겨울나무처럼

[ 연재 ] 환경운동가 최병성 목사의 보시기에 좋았더라<2>

최병성 목사
2017년 02월 14일(화) 14:06

한 여름 무성하던 잎이 떨어지고 나면, 잎에 가려 보이지 않던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다. 굵고 우람한 줄기로부터 부러진 가지와 들쭉날쭉 불균형적인 몸매 등 무성한 잎에 가려있던 자신의 부끄러움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서 있다.

아무런 가감 없이 맨몸으로 서있는 겨울나무를 볼 때에야 '아, 네가 이렇게 생겼구나'라며 이제야 진정으로 알았다는 느낌이 든다. 잎이 무성한 여름보다 벌거벗은 겨울나무를 통해서 나무를 더 알게 되고, 더욱 정감이 가는 이유는 그의 솔직함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참 모습들을 감추고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부부와 친구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가면을 쓰고 있다. 솔직한 감정과 아픔들을 감추고 자신의 지위와 역할에 맞는 허위와 가식이라는 가면으로 살아간다. 

남자는 울면 안된다는 사회 통념에 따라 남성들은 '나는 강하다'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오늘 내 마음은 쓰라림과 고통 중에 있건만 그저 '좋습니다'라는 가면을 쓴다.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고 '나는 거룩하다'는 경건의 가면을 쓴다.

우리의 웃음 뒤엔 쓰라린 고통과 슬픔이 숨겨져 있다. 내면의 아픔과 상처들을 거짓 웃음으로 가리는 연기자가 된다. 우리는 자신의 안에 분노와 불안을 숨기기 위해 가면을 쓴다. 서로에게 내 약점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가면 쓴 모습을 바라보며 '나만 왜 보잘 것 없을까?' 생각한다. 당당해 보이는 친구 앞에 내 연약함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굳게 붙든다. 가면의 악순환이다.

이제 우리는 벌거벗은 겨울나무처럼 투명해져야한다. 자신의 역할과 남의 기대에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불안과 고통을 감추고 살아가는 가면을 벗어야한다. 하루 종일 미소의 가면을 써야하는 백화점의 아가씨들이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처럼, 가면을 쓰는 것은 스스로를 고문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아픔과 슬픔을 감춘 채, 늘 새로운 헌신을 다짐하며 경건의 모양으로 포장한다. 그러나 기도란 하나님 앞에 겨울나무가 되는 것이다. 기도란 내 아픔과 상처와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내어 놓고 그분의 어루만지심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그분은 우리의 아픔과 슬픔을 가져가고 기쁨으로 채워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겨울 숲에 서면, 가면을 벗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있는 경건함을 느끼게 된다. 겨울나무처럼 하나님이 내게 기대하실 것 같은 겉모습과 지위와 역할이 아니라, 내 안에서 울부짖는 영혼의 외침을 들어보자.

내가 경건의 가면을 쓸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피상적 단계에 머물 뿐이며, 그저 시간을 소모하는 것에 불과하다. 경건의 가면을 벗고 가난한 심령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위로와 치유의 손길을 만나게 된다. 경건과 열심의 가면을 벗는 순간, 우리를 짓누르던 짐이 벗겨지고 하늘을 나는 자유로운 새가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 투명하고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 새 생명의 봄을 맞이하기 위해, 때론 겨울나무처럼 모두 벗어버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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