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감당 못한다는데…

[ 논설위원 칼럼 ]

양의섭 목사
2017년 01월 24일(화) 16:27

옛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데리고 가는데 사람들이 웃는다. "당나귀를 타고 가면 편할텐데 바보 같이…" 그래서 아버지가 타고 아들이 고삐를 잡았다.

이에 사람들이 그런다. 어떻게 애비란 자가 어린 아들은 고삐를 잡게 하고 자기는 편히 타고 가느냐고. 아버지는 당장에 아들을 태우고 자기가 고삐를 잡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수군댄다. "저런 버릇없는 자식이 있는가? 어떻게 아버지를 걷게 하고 아들이 버젓이 타고 가는가?" 그래서 이번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다같이 올라탔더니 사람들이 욕한다. 불쌍한 당나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귀가 얇다. 어느 정도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어야 하지만 지나치면 자신의 존재감이 없어진다. 신앙도 그렇지 않은가? 그건 다수의 가치가 아니다. 그건 자신의 소신이요, 자신만의 가치관이요 생명이다. 세상이 결코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기에 세상의 평에 너무 연연할 필요가 없다. 나름대로 고고한 가치가 있다.

그럼에도 요즘 교회는 세상에 쩔쩔 맨다. 설문 조사에서 교회 호감도가 떨어졌다고 위기감이 팽배했었다. 교회는 금방이라도 도태되고 무너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더니 얼마 전의 종교인구 조사에서 기독교가 불교를 앞섰다고 싱글벙글이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종교가 어찌 세상을 바라보는가? 어찌하여 세상의 시선에 일희일비(一喜一悲) 하는가? 세상을 뒤로하고 오직 예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성령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속에 당당하게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겠다는 이들이 왜 세상의 시선에 쩔쩔매는가? 잊었는가?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실상 욕에 가까웠다는 것을.

안디옥의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과는 다르게 사는 것을 보고 '쟤네들은 좀 유별 나'하여 출현한 단어이다. 성도는 세상에서 왕따였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런 시선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욱 더 예수님께 주목했고, 더욱 더 유별난 성결과 사랑과 희생과 진실과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았다. 도무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삶을 살았다. 그러기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11:38) 하였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의 성도들은 세상이 자신들을 감당해 주기 바라는 것 같다. 세상이 제발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돌아서자. 신앙은 어차피 결단이요, 세상을 등지는 것이요, 시선을 하늘에, 우리 주 예수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세상을 섬기고 희생하는 것도 예수님께서 하라 하시기에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종교가 아닌 사회사업이요, 자선단체에 불과하다.

우리의 삶이 철저히 종교성을 가지려면 세상의 시선에 주목하는 자세에서 오직 예수님께로 돌아서라. 예수님께서 하라는 대로만 하면 세상은 우리를 감당 못하겠다고 두 손 들 것이고,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하고 물어올 것이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교회, 그게 다시 거룩한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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