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언론 (2)사회 언론에 비친 기독교

[ 교회와 언론 ] 교회, 어른스러움 회복해야

김한수 기자
2017년 01월 12일(목) 08:30

김한수
조선일보 종교전문기자

 

"어린 시절에 나는 오랫동안 개신교 교회에서 운영하는 주일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그곳에서 다른 종교들을 비판하고 질책하는 행동에 항상 마음이 불편했다. 게다가 각 가정에서 낸 헌금이 교회 벽에 공개되는 것도 참 이상했다. 월수입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십일조 헌금을 이렇게 공개하는 것은 결국 각자의 생활수준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므로, 아버지 말씀대로 일종의 말없는 경쟁을 부추기는 것이었다. 교리는 지켜질지 모르나 마음은 닫혀버리는 것이 아닐까. 어린 나이에 나는 벌써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젊은 피아니스트 임현정 씨가 최근 펴낸 '침묵의 소리'(청미래)라는 책의 일부분이다. 다소 장황하게 이 책 내용을 인용한 이유는 임씨의 고백이 일반인 눈높이에 비친 한국 개신교계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고 있으며 나아가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올해 만 31살이 되는 임 씨는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나 13살에 홀로 프랑스 유학을 떠나 현재는 세계 정상급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브뤼셀 한인교회에 출석하고 있다고 밝힌 그는 교회에 대해 "어떤 의미에서 나의 어린 시절을 찾아가는 여정과 같았다"며, "나는 기독교인들의 태도나 그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에는 공감하지 않았지만 말씀의 권능이 내 앞에 점진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성경 자체를 무척 좋아한다"고 밝혔다.

필자가 종교분야 취재를 시작한 것은 2003년부터였다. 당시는 교회에 대한 비호감도가 증가하고 있던 때다. 담임목사직 세습, 성장제일주의 등이 비판받고 있었다. 당시 담당기자로서 흥미롭고 특이하다고 생각한 점은 정작 개신교계의 반응이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우리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라고 할까. 실제 취재현장에서 "언론에서 일부 목회자와 교회의 잘못을 전체의 문제처럼 자꾸 부각시켜서 비호감도가 높아졌다"는 항변도 무척 많이 들었다. 그때 느꼈던 점은 "일반 국민들은 개신교가 이미 상당히 성장했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에 걸맞은 책임과 역할을 주문하고 심지어는 위협을 느끼고 있는데, 정작 개신교 내부에서는 '우리는 아직 덜 컸다'고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교회 밖에서는 이미 '개신교는 배타적이고, 전도는 공격적'이라는 인식이 싹트고, 확산되고 있었던 것 같다. 위에 인용한 책에서 임씨의 부모가 교회를 다니면서도 불편하게 느낀 점과 교회를 떠나게 된 배경엔 이런 배타성, 공격성도 일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 개신교로서는 2007년은 잊지 못할 해일 것 같다. 2007년 벽두부터 한국 개신교는 흥분했다. 평양대부흥 100주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 개신교는 이미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교회의 성장세가 꺾였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었고 개신교계는 부흥을 위해 다각도로 움직였다. 2006년 미국의 릭 워렌 목사를 초청해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집회를 연 것은 한국 개신교 성장의 기폭제가 됐던 1970년대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여의도 부흥회를 연상시켰다. 부흥운동의 정점은 2007년 7월 8일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 그러나 기념대회 직후 발생한 아프가니스탄 인질 사건은 축제분위기에 찬물을 뒤집어 씌웠다. 입에 담지 못할 온갖 비난과 저주가 쏟아졌다. 개신교계는 죄인 취급당했고, 이후 개신교계는 공식적으로는 '반성 모드'로 바뀌었다. 거의 모든 집회에서 '회개'란 단어가 빠지지 않았다. 일반 사회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한 노력,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구제와 봉사에도 앞장섰다. 특히 2007년말 충남 태안에서 발생한 기름 유출 사건 때에는 개신교계가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고, 교회 규모를 막론하고 너도나도 앞장서 달렸다. 이후 한국 교회는 '교리는 교회를 나누지만 봉사는 교회를 하나로 만든다'는 구호 아래 힘을 모으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작년말 통계청이 발표한 '2015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는 모든 종교가 뜻밖으로 받아들였다. 개신교가 국내 신자 1위의 종교로 올라서고, 불교와 천주교는 신자수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발표 직후 불교, 천주교계는 일시적으로 충격에 빠졌지만 이내 '반성' '자성(自省)' 모드로 바뀌었다. 불교계는 "지금까지 포교에 안이했다"고 했고, 천주교계도 "미사 참례율이 추락하고, '쉬는 신자'(냉담자)가 늘어나도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며 자성하고 있다. 필자에게 불교와 천주교의 반응보다 더 놀라운 것은 개신교의 반응이었다. 불과 10여 년 전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면 "그럼 그렇지~"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번엔 개신교계 거의 모든 반응이 "자만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오버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개신교인이 늘었다는 통계 수치보다는 전체 종교인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 걱정"이라는 반응도 나왔다. 필자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지난 20년 가까이 개신교계가 비판받아온 세월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총회장 이성희 목사는 일간지 기자들과 간담회에서 "그동안 한국교회는 위만 바라보고 뛰느라 '옆'을 못 봤다"고 했다. "한국 사회가 경제성장 중심으로 달려오면서 노사문제를 비롯한 허점을 노출했듯이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장, 성장을 외치면서 매 10년마다 신자수가 2배씩 늘어났습니다. 세계 기독교사에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지요. 그러다보니 사회를 놓쳤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사회를 외면한 결과로 사회로부터 교회가 외면당하게 된 것입니다. '성장 신드롬'을 벗어나면 그때부터 (진정한) 교회 성장이 일어날 것입니다." 올바른 진단이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가 처음부터 '옆'을 돌아보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 개신교는 130년 전 선교 초기부터 어떤 종교보다 더 우리 사회를 챙기며 민족 희망의 역할을 맡아왔다. 신분제도의 굴레를 넘어 교육과 의료를 통해 사랑을 베풀었고, 일제시대에는 민족운동의 요람 역할을 했다. 3ㆍ1운동 당시 전체 인구의 1.3%에 불과했던 개신교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참가할 정도로 지도적 위치를 차지했다. 민족지도자, 독립운동가, 선각자를 무수히 길러냈다. 한마디로 '어른스러운 종교'였다. 소수 종교이던 시절 더 어른스러웠던 개신교는 고속성장을 하면서 과거의 어른스러움을 잊었던 듯하다. 

이제 한국 개신교는 어른스러움을 회복해야 할 기회를 다시 얻었다. 다만 그 방법은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든 임현정 씨의 예에서 보듯이 젊은 세대는 종교를 대하는 태도가 부모세대와 다르다. 전체 종교인구는 감소하지만 오히려 종교 서적 혹은 영성 서적의 수요는 꾸준하다. 특정 종교보다는 '종교적인 것'에 대한 수요는 여전하다는 분석이다. 이런 경향은 개신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에게 기회이자 위기일 수 있다.

최근 우리를 둘러싼 정세는 구한말을 연상시킬 정도로 위기가 중첩돼 있다. 국민의 불안감도 높아지고 있다. 어느 때보다 종교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이다. 국민들에게 믿고 의지할 만한 '어른스러운 종교'가 더욱 절실한 때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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