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 목양칼럼 ]

이재학 목사
2017년 01월 03일(화) 14:23

어떤 분의 글을 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자기 딸이 세 살 쯤 되던 어느 날 부부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그 모습을 본 세 살배기 딸이 아빠와 엄마를 앉으라고 하더니 갑자기 어깨동무를 하며 하는 말이 "우리 쫌 사이좋게 살자"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세살배기 아이의 눈에도 서로 다투는 모습이 결코 좋아 보이진 않았던 것이다.

부부가 결혼할 때는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기 위해 결혼하지만 살다보면 부부싸움으로 멍드는 가정들이 있다. 다툼은 가정 뿐 아니라 회사에서 동료들과 학교 친구들과 더 나아가 나라와 나라사이에서도 다툼은 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다툼이 있다. 교회에서 다투는 모습을 경험한 목회자들은 많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경험하면 목회자는 목회의 무기력함을 느끼게 된다.

인간이 사는 어느 곳에서나 다툼은 있을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다툼의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의 집도 다툼이 있어 큰 아들이 동생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사건이 생겼다. 오순절 성령이 충만했던 초대 교회도 히브리파와 헬라파의 구제 문제로 다투었다.

바울과 바나바 같은 사람도 마가 문제로 다투었다. 교회도 죄인인 인간들이 모인 곳이기에 다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지혜롭게 처리하는가는 정말 중요한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다툼으로 하나님 영광도 가려 버리고, 자신도 상대방도 교회도 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본 교회로 부임한지 올해로 11년이 된다. 11년 전 본 교회는 성도들 간에 다툼이 있었다. 이 다툼으로 17년을 목회한 담임목사가 교회를 사임해야만 했고 그 후임으로 필자가 부임하게 되었다.

부임해 보니 성도들의 상처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상처를 싸매어 주고 교회를 화합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가장 큰 사명이었다. 이것을 놓고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혜를 달라고 매일 눈물로 기도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은 내게 응답으로 '이제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를 위해 죽네'라는 복음성가를 주셨다. 매일 강대상 밑에 엎드려 교회를 위해 기도를 하면 나도 모르게 이 찬양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래서 날마다 그 찬양을 따라 불렀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응답으로 확신했다. 그러던 중 '그래! 이 찬양을 예배 중에 온 성도들과 함께 부르자'는 마음을 주셨고, 그 다음 주부터 축도 전에 온 성도들이 일어나서 함께 불렀다.

이 찬양이 성도들 입에서 터져 나오자 나를 비롯한 많은 성도들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고 흐르기 시작했다. 성도들은 교회의 존재 목적을 생각하기 시작하며 이 곳 저 곳에서 회개의 기도와 서로를 생각하는 모습들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교회의 존재와 목회자의 존재는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사명'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주를 위한 것은 뒷전이고 나를 위한 내 욕심으로 살아가는 부끄러움이 많다.

오늘도 내일도 대중가수 현철씨의 노래가사와 같이 '앉으나 서나 당신'이 아닌 '앉으나 서나 주님생각'으로 '이제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라는 이 찬양을 부르며 주님을 위한 아름다운 목회자와 성도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재학 목사/울산온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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