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12월 26~31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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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3일(금) 13:45

월-창밖을 보라
본문 : 눅 2:1~7
찬송 : 115장

안데르센의 동화 중에 '성냥팔이 소녀'라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추운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 한 굶주린 성냥팔이 소녀가 추운 거리를 걷고 있다. 성냥을 팔지 못하면 집에 돌아갈 수도 없는 소녀는 거리를 헤맨다. 그러는 사이에 날이 어두워지고 밤은 깊어간다. 거리에는 인적이 사라지고 바람을 피하며 소녀는 유난히 불이 밝은 어느 집의 창가로 다가간다. 창 안에는 성탄절을 준비하는 평화로운 가정의 모습이 보인다. 따뜻한 벽난로가 있고 포근한 소파가 있고 선물들도 있다. 그리고 거기에 자기만한 예쁜 아이가 즐겁게 성탄 파티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단란한 가정의 모습을 보면서 꽁꽁 언 손을 녹이기 위해 소녀는 성냥 한 개비를 긋는데 성냥을 그을 때마다 온갖 환상이 소녀 앞에 나타난다. 그 환상 속에서 할머니를 만난 소녀는 자신도 그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소녀는 할머니를 계속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해 남은 성냥을 몽땅 써버린다. 그러자 사방은 밝아지고 소녀는 할머니에게 안긴 채 하늘 높이 올라간다. 다음날 날이 밝자 소녀는 미소를 띤 채 죽어 있었다. 이 동화의 마지막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러나 소녀가 어떤 아름다운 것을 보았는지, 얼마나 축복을 받으며 할머니와 함께 성탄절을 맞이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이가 들어서 동화를 다시 보아도 슬프기는 마찬가지이다. 왜 그럴까? 이 이야기들에는 우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성탄의 기쁨을 맞이하려는 사람들은 분주하게 자기 집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정작 그들에게 애원하는 소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밝히고 벽난로의 불을 피우고 선물을 마련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따뜻한 가정의 창밖에서는 한 소녀가 죽어가고 있었다. 왜 가족들 중 누구도 창밖을 보지 못했을까? 사람들의 마음이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먼길을 떠났다. 날은 어둡고 아직 갈 길은 남았는데 어두워져서 더 갈 수 없었고 마침 아기가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느 곳에서도 이 아기를 받아줄 곳이 없었다. 방이 없었기 때문일까? 정말 그것이 이유일까? 당시에 돈 있는 사람, 힘 있는 사람들에게도 방이 없었을까?
 
모든 사람이 행복한 성탄절의 이면에 여전히 남아있는 소외와 고독의 아픔이 있다. 우리 시대에도 성냥팔이 소녀들이 존재한다. 예수님은 창안이 아니라 창밖에서 세상에 나셨다. 영광을 받으실 주님은 집안에 계시지 않는다. 힘 있고 부유한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탄절의 주님은 문을 열고 나와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창문을 열어야 한다. 그리고 저들의 손을 잡아 이끌어서 따뜻한 곳에 함께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몸이 따뜻한 곳이 아니라 마음이 따뜻한 곳이다. 성도는  마음이 따뜻한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살피는데서 벗어나 눈을 들어 주님의 시선을 따라 창 밖을 보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과 사랑과 섬김이 필요한 이들을 가슴으로 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덕신 목사
영도교회


화-당신의 은혜를 입기 원합니다
본문 : 룻 3:9~11
찬송 : 104장

룻기 3장에 어머니 나오미가 룻에게 보아스의 타작 마당에 가서 저녁에 보아스가 누울 때에 발 끝에 누우라고 한다. 잘못 오해하면 룻 자신에게 부정한 여인으로 몰려서 돌에 맞아 죽을 상황으로 전개될지도 모르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런데 룻이 순종한다. 물론 시어머니 나오미는 룻의 행복을 위하여 이 말을 한 것이다. 그래서 룻에게 갈 때에 나오미처럼 하고 가라고 하기도 한다. 즉 일이 잘못되면 룻이 한 행동이 아니라 나오미 자신이 한 행동으로 하려고 한 것이다. 룻은 그대로 행하는데 이것이 사랑하며, 경외하며, 신뢰하는 사람의 자세이다.
 
9절에 보아스가 "네가 누구냐"라고 물으니 룻이 "나는 당신의 여종 룻입니다.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어주세요"라고 말한다. 이 말은 청혼에 대한 말이다. 말씀 전개를 보면 보아스는 룻에게 꾸중하거나 할 상황인데 보아스는 몇 가지 복을 선언한다.
 
첫째, "여호와로 복을 받은 자"라고 말을 한다. 하나님께 왔으니 복이고,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살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면서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 모습이 복이라는 말이다. 보아스는 룻이 그 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고 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보아스가 알고 있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계실까? 언약을 따라 하나님을 소망하면서 사는 그들을 향하여 복 있는 자라고 하신다.
 
둘째,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말한 모든 것을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룻이 은혜입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보아스가 요청한대로 행하겠다고 하면서 자신을 던져 룻이 은혜입도록 한다. 이는 믿음의 사람이 은혜입기를 소망할 때에 약속하신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당신을 십자가에 죽어 은혜 안으로 인도하심에 대한 선언의 말이기도 하다.
 
셋째, "네가 현숙한(능력있는) 여인이라는 것을 나의 성문 안의 모든 백성이 알고 있다"라고 칭찬한다. 보아스를 '유력한(능력있는) 자'라고 말하고, 룻을 '능력있는(현숙한) 여인'이라고 말씀한다. 보아스도 이상적인 남자요, 룻도 이상적인 여자라는 말이다. 룻은 본래 이상적인 여자가 아니었다. 죄악의 길에서 살고 있었는데 나오미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 후에 이상적인 믿음의 여인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상적인 두 사람이 만나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게 하려고 섭리하시며 룻을 다윗의 가문의 이상적인 복된 자로 만들기 위하여 보아스를 준비하고 만나게 하셨듯이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고 이상적인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해 섭리하신 것이 성탄절이다. 그분을 기다리며 담대함으로 나아가 믿음으로 "주여 나는 당신의 은혜입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당신의 오심을 기다리며 당신의 은혜를 입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다리옵나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임형진 목사
포근한교회


수-아름다운 마무리
본문 : 시 90:9~17
찬송 : 492장

마지막을 생각하면 모세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떠올릴 수 있다. 모세는 12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인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강건했다(신 34:7). 사람은 시작보다 마무리가 더 중요하다. 우리 남은 날들을 어떻게 해야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통해서 아름다운 마무리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깨닫게 하신다.
 
먼저 모세는 자신의 인생의 날을 계수하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우리 인생은 안개와 같이 금방 피었다가 없어지는 풀과 꽃같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우리는 호의호식하며 누릴 것 다 누리며 잘 살다가 하늘나라에 평안하게 가고 싶어 하지만,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앞으로 남은 인생 동안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난 세월이 아니라 남아있는 미래이다. 세월을 아끼는 사람은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며 후회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은 날들을 지혜롭게 잘 계수하는 사람이다.
 
둘째로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 주님 안에서 늘 기쁨으로 살아야 한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인자함, 그 사랑을 맛볼 때 만족이 온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많이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 물질, 권세, 지혜 등 가진 바를 적절하게 사용하며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볼 수가 있고, 그로 인해 만족과 기쁨과 즐거움의 삶도 살아가는 것이다.
 
셋째로 모든 행한 일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세워져야 한다. 모세는 "행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우리는 손으로 많은 일을 하지만 다 견고케 되는 일은 아니다. 도리어 인생을 허물어트리는 일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모세는 남은 인생 동안에 손으로 행한 일들을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견고하게 해 달라고 반복해서 간구한다. 생각과 꿈이 늙어 버리고, 의욕이 늙어 버리고, 용기가 늙어 버리고, 행동이 늙어 버리면 앞서 행한 우리의 모든 일들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믿음의 사람들은 인생의 후반부가 더 견고하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모세처럼 바울도 마무리가 아름다웠다. 바울의 인생 후반은 휴식의 때가 아니라 그야말로 만년 젊은이와 같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이를 탓도 하지 말고, 연륜도 자랑하지 말고, 오직 남은 때를 잘 아껴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도록 힘쓰자.
 
오늘의 기도
 
늘 우리 인생을 계수할 지혜를 주시고 기쁨으로, 견고한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병문 목사
울산호계교회

목-구속사를 위해 살았던 여인-밧세바
본문: 마 1:1~16
찬송: 487장

마태복음의 족보 가운데 네 번째로 등장하는 여인은 밧세바이다. 그녀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우리야의 아내'였다. 그녀의 이름 앞에 있는 수식어는 영원히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운명과 신분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 그녀의 운명이 예수님의 족보 가운데 들어오는 영광스러운 이름이 되었다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의 범죄가 일어날 때는 다윗이 통일왕국 왕으로서의 최전성기를 누리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다윗의 태도와 모습은 달라져 있었다. 부하 장수들과의 전우애는 사라진지 오래였고, 이스라엘의 군대가 전투에 나가서 싸울 때 자신은 궁에 머물러 남아 있었고 결국 우리야의 아내가 한밤중에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데려다가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비정한 왕이 되고야 만다.
 
사건이 터진 뒤에 문제를 해결하는 다윗의 모습도 생소하게 다가온다.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아끼는 부하를 속이고 죽이는 데까지 모사를 꾸미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밧세바는 다윗의 아내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여러가지 정황에도 불구하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면 밧세바는 자신의 기구한 여인의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남편으로 섬겼으며 그들의 사이에서 솔로몬 왕이 태어나는 통로가 되었다. 물론 짧은 시간과 사건의 개념으로만 보면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렵지만 좀 더 넓은 구속사적인 안목에서 보면 다윗의 대를 이을 수 없는 자격과 차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여인으로서의 모습을 통해 다윗의 대를 잇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솔로몬 왕을 낳는 생명을 이어가는 역할을 감당해갔다는 것이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자신이 운명이 가장 슬프고, 비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비정한 운명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이기고 생명을 낳는 은혜를 입었다. 밧세바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과 슬픈 역사를 뛰어 넘어 왕의 계보, 예수님의 계보를 잇는 일에 기꺼이 쓰임받았던 것이다.
 
오늘 내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하고 낳고 길러야할 생명의 씨를 책임지는 자세로 살아가는 구속사의 삶을 향한 여정으로 나아가시길 바란다. 슬픔과 분노가 난무한 이 시대에 소명을 지키고 생명을 지키기 위한 나의 자세가 재림의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사용되시는 거룩한 믿음의 계보가 되시기 바란다.
 
오늘의 기도
 
내가 지고가야 할, 책임져야 할 사명이 있다면 기꺼이 지고가는 아름다운 구속사의 삶이 되게 하셔서 오늘도 생명을 책임지고 나아가는 운명적인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성욱 목사
꿈이있는교회

금-에벤에셀의 은혜
본문 : 삼상 7:12~14
찬송 : 301장

그리스도인들은 일년을 뒤돌아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일까? 아마도 '은혜'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많기 때문에 은혜를 망각하고 살아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때를 따라 선하고 좋은 것들을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것이 바로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할 일이 있다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일 뿐만 아니라, 교회공동체 안에서 기쁨으로 섬길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본문을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면서 먼저 모든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으고, 다시 하나님만을 온전히 섬기기 위한 영적 대각성운동을 전개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을 들은 블레셋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번에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기고 이스라엘을 치러 왔다.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사무엘에게 이르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해달라"고 한다.
 
사실 블레셋은 사무엘 선지자 이전에도 틈만 나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괴롭혀 왔다. 사무엘상 4장에 보면 이전에도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침공을 받아 에벤에셀 곁에 진을 친 전투가 있었다. 그 전투에서 4천명이 죽고 패한 이스라엘은 패한 원인을 분석한 결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앞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국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를 메고 다시 전쟁에 나갔지만 이번에는 3만 명이 죽고 하나님의 법궤마저 빼앗긴 후 홉니와 비느하스도 그 전쟁에서 죽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또다시 패배를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움에 떨면서 사무엘 선지자에게 간곡하게 쉬지 말고 기도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해 달라고 말한 것이다. 사무엘이 어린 양 한 마리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릴 때에 블레셋이 싸우려고 가까이 왔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응답의 표징으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심으로 블레셋이 이스라엘 앞에서 크게 패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힘으로는 도저히 물리칠 수 없는 블레셋을 한순간에 물리치셨다. 사무엘 선지자와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그 은혜를 잊지 않도록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기념비를 세우고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였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난공불락의 성과 같은 불레셋을 물리쳐주셨다. 에벤에셀의 은혜를 누리는 비결은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한해를 도우시고 인도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미숙 목사
여교역자 안식관 원장


토-나그네의 인생길
본문 : 벧전 2:11~12
찬송 : 508장

올해의 마지막 한 주간은 살아온 생을 한번쯤 돌아보면서 새해를 맞기 전에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결산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데 결산할 때에 부끄럽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려면 우리 인생은 어떤 인생인지를 바로 알아야 하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어떻게 살아할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첫째, 우리 인생은 나그네 인생길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나그네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가는 사람을 말한다. 즉 본향을 향해 가는 사람이다. 나그네는 지금 머물고 있는 곳에 마음을 두고 애착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항상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날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이다. 또한 행인이라고 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그네요 행인일 뿐이다. 우리의 목적지는 천국이다.
 
둘째,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며 살아야 한다.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씀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두 세계를 살아간다. 하나는 육적인 삶을 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육적인 세계만 추구하며 산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더 귀중하게 여기면서 사는 사람들이다. 영적인 세계를 승리로 이끌려면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 영적인 세계와 육적인 세계는 반비례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영원한 것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영적인 삶을 살려면 영적인 것을 무너뜨리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셋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는 믿음 안에서 예배와 감사와 섬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또한 이방인들 가운데서 행실을 선하게 함으로 비방을 받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거룩한 영향력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살려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 기도함으로 영적으로 깨어있고 분별력을 가진 성도가 되어야 한다.
 
오늘의 기도
 
남은 시간이 나그네 인생임을 기억하게 하시고 영혼을 풍성하게 살며 아름다운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환국 목사
예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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