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슈타우피츠/루터의 스승

[ 김인주 목사의 이주의인물 ]

김인주 목사
2016년 12월 21일(수) 10:28

1524년 12월 28일 요한 폰 슈타우피츠가 잘츠부르크에서 사망하였다. 학문적으로 좋은 경력과 능력을 갖추었기에 비텐베르크 대학을 창설되면서 신학부 학장으로 초빙되었다. 그 시기에 어거스틴 수도회의 독일지역 총책임자가 되었다. 에어푸르트에 순회하던 중에 루터를 만났고, 비텐베르크에서 신학수업을 받으라고 권유하였다.

좋은 인품으로 그는 루터의 멘토가 되었다. 그는 당대의 많은 신학자들의 벗이었고, 지식인들의 신망은 두터웠다. 개혁의 뜻을 품은 동역자들도 그의 신학을 매우 좋게 평가하였다.

이신칭의라는 구원에 대한 루터의 신학은 슈타우피츠의 생각을 심화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평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로마교회와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스승은 주춤거렸고, 끝내 물러섰다.

루터의 항거로 인하여 수도회가 문제되면서 슈타우피츠는 1520년 여름에 수도원장에서 물러났다. 그의 언행은 주목을 받는 위치가 되었다. 잘츠부르크로 옮겼지만, 개혁의 주장들을 반대하는 글을 쓰도록 강요받았다. 옛 제자와 동료들을 향하여서 과도한 비난을 쏟아내야 했다.

노선을 바꾼 지식인 혹은 성직자의 비애를 여기서도 보게 된다. 율법을 무시하고 선행 혹은 공로가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라고, 개혁진영의 구원관을 곡해하여 공격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개혁의 대열에 참여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신학자, 주교, 영주들 중에서도 교회가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은 품고 있는 경우는 많았다.

이들은 교회를 리모델링(reform) 하는 정도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마교회의 경계를 벗어나서 새로운 교회를 세워야 한다(reformation)는 생각하기에는, 포기해야 할 기득권이 많았다. 서로가 공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지만, 다시 만날 수 없는 길을 택하여 갈라설 수밖에 없었다.

<봉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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