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국가 정치 (2)성서에서 바라본 정치

[ 특집 ] 권세,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소기천 교수
2016년 12월 15일(목) 11:16

소기천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탄핵정국에서 대통령이 법을 어길 경우에 성도가 가져야할 태도에 대해서 성경이 주고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목사들과 장로들까지도 광화문에서 벌어지는 길거리 시위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오늘날 "정치권력이 국민들로부터 유래한다"는 민주주의 사상은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성경말씀과는 상치되지 않는가? 로마서 13장 1~7절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권세자의 편을 드시는 것처럼 들린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자요 일꾼으로 일하는 자이다. 그러나 그가 불의한 권세자일 수도 있는데, 그에게 복종하라는 것은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말씀이지 않는가?

예레미야 예언자의 시대에 남북이 분열된 상황에서 북쪽 이스라엘이 먼저 망하고 남쪽 유다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유다 왕국도 혼란스러웠다. 위기의 때가 닥치면 일제히 일어나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길거리로 나온다. 그 때 종교지도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그들의 말은 너무나도 달랐다. 이런 혼란스런 와중에 예레미야를 통하여 주신 말씀은 놀랍다. "너는 이 백성을 위해 축복을 구하지 말라. 금식할지라도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리라."(렘 14:10∼12) 거짓 예언자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을 외쳐댄다. 그러나 참예언자 예레미야는 "나라가 망하고 포로가 된다"고 말하니 배척당하였고 급기야는 돌까지 맞았다. 결과는 어찌 되었는가? 유다 나라는 멸망하였고 그들은 포로로 잡혀가 70년간 후회하면서 살아야 했다. 우리나라도 이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회개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국가와의 관계를 어떻게 가질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이다. 성경에는 여러 곳에서 성도와 국가와의 관계를 취급하고 있으나 로마서 13장 1~7절에서처럼 직접적으로 국가와 성도의 관계를 명료하게 말씀하신 곳은 없다. 거기에 나온 내용을 요약해보면,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으로 관원들은 법의 집행자이기에 하나님의 사자이다.(3~4절) 관원들은 선행자를 칭찬하고 악행자를 벌하는 하나님의 일꾼이다.(6절) 성도는 억지로 하지 말고 양심을 인하여 권세에 굴복해야 한다.(5절)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엄청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난해한 구절이다.

로마서 13장 1~7절은 12장 1~2절과 13장 11~14절의 맥락, 즉 종말론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여기서 국가와 정부의 구별이나 악정(惡政)의 경우에 대해서가 아니라, 종말을 대망하고 있는 성도에게 사랑의 실례로서 국가에 대한 복종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하나님은 왕중왕, 즉 역사의 주관자로 소개되어 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의 역할은 '하나님의 사자' 또는 '하나님의 일꾼'이란 표현에 나타나 있다. '사자' 혹은 '일꾼'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디카이오노스로, 둘 다 '일꾼'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서 맡기신 선한 일에 힘쓰는 자들이란 뜻이다. 또 그들에게 쥐어진 '칼'로 상징되는 내용은, 세상 질서를 바로잡은 직책이 그들에게 부여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권세자에게 순종하라는 것은, 단지 그들의 권세에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다. 권세자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권세 잡은 자를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돕기 위해서 세우신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도가 두려워 할 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다. 권세를 세우시고 거두시기도 하시는 하나님이 두려움의 대상이지 결코 세상의 권세나 힘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성도는 권세를 경배하지 않고, 도리어 권세를 주신 하나님을 찬송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위에 세우신 권세자는 그 누구라도 우리를 돕기 위한 일꾼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보지 않고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한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겠는가?

로마서 13장 11~14절은 종말의 긴박성을 표현한 것으로 어거스틴의 회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말씀이다.('참회록' 8:12, 23)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때'를 분별하여 아는 것이다.(전 3장 1~8절) 여기서 '때'란 말인 희랍어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특정한 시기를 뜻한다. 그러면 여기서 '잠'이란 무엇을 상징할까? 그것은 현세와 육욕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곧 잠에서 깨어난다는 말씀은 세상의 악으로부터 깨어난다는 뜻이다.

바울은 현재의 상황을 '밤'으로 규정하였다. 바울이 말하는 시간은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이 아니다. 인간 종말이 다가왔다고 경종을 울리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도 이미 역사의 밤이 짙어져 그 마지막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서있다. 인간이 재량껏 쓸 수 있는 시간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밤은 어두움을 가르치고 인간의 타락상과 죄와 멸망을 상징한다.

어두움의 속성은 밝은 빛을 싫어한다. 어둠에 익숙해진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어둠 속에 살아가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오기를 싫어한다. 담 밑에 있는 돌 하나를 들쳐보면 그 밑에서 오랫동안 숨어서 살던 벌레들이 곤충들이 숨을 곳을 찾아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밝은 태양을 무서워한다. 본능적으로 어두운 곳에만 익숙해져 빛으로 발견되는 것을 싫어한다.

이와 같이 최후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뚜껑이 다 열리고 모든 비밀들이 다 벗겨지고, 그 때 마음 속 응달에 비밀히 감추어져 있던 모든 어둠의 일들이 견디지 못하고 다 백주에 폭로될 것이다. 성경을 보면 "그때 사람들은 어두움을 견디지 못하여 산아 무너져라, 바윗돌아 나를 가려라고 할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폭로되는 것이 두려운 비밀들이 있다. 이러한 심리가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의 비밀을 폭로하는 것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보상심리로 작용한다고 한다. 자신의 어두운 행실과 과오는 비밀에 붙여지기를 바라는 심리적 방어의식이나 불안한 잠재의식이 다른 사람의 비밀을 폭로하는데 열중하거나 혹은 타인의 비리를 보고 격분하는 이상행동을 유발한다고 한다. 남의 죄악과 어두운 행실에 대하여 대담하게 폭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의 거짓된 것과 어두운 것과 비밀한 것들이 폭로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라고 말하고 있다. 21세기를 맞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시대를 바로 볼 줄 아는 눈을 가지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사람들보다 먼저 깨어 일어나 시대를 바로 볼 수 있을 때, 그 시대의 선구자가 되어 21세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이끌어 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의 진정한 역할인 것이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세워 놓은 정치나 이념, 조류나 유행을 그냥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깨어 일어나 시대를 앞서 보며 시대를 이끌어 가고 지배하는 위치에 서야 한다.

권세에 대해서 민주주의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고 말한다. 그렇다. 성도는 대통령과 여야 정치인들이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의 올바른 도구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