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잡한 설교와 순전한 설교

[ 논설위원 칼럼 ]

김세광 목사
2016년 12월 14일(수) 10:05

필자가 최근 학술지에 실은 '설교 청중으로서 하나님에 관한 소고'라는 글은 초기 작업에서부터 논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설교 청중의 위치에 둔다는 논지는 기존 개념과는 상반되기 때문에 대학원 수업에서나 신학교수님들과의 학술모임에서도 뜨거운 주제였습니다.

필자가 이 주제를 다룬 이유는 복음적 설교의 기준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설교의 홍수 시대에 역설적이게도 복음에 대한 갈증은 더해진 듯 한데 초기 한국교회에 비해 혼잡한 설교들 속에 마음놓고 먹을 영의 양식인 순전한 설교가 적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명한 설교자들의 실망스런 추문들,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유력한 설교자들의 설교 표절 논란으로 실망과 탄식의 소리가 들릴 때는 이기심과 혼잡성의 심각성에 있어서는 최근 한국의 국정 농단 상황과 다를 바 없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경이 보증하는 순전한 설교의 기준이라고 여기며 주장하고 있는 것들로는 성경 인용의 분량이나 해석의 적실성, 설교적 영향력, 회집 인원의 수, 또는 설교자의 인격과 삶 등이 있습니다.

필자의 논지는 이 기준들보다 더 중요하지만,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고 있는 데, 순전한 복음적 설교란 하나님이 청중이되시는 설교라는 논지입니다. 즉, 설교 청중이신 하나님을 향한 적합성이 기준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필자의 새로운 설교학 이론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자로부터 특히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선언한 '하나님 앞에서 말하노라'(고후2:17)에서 강조한 바입니다. 이 말을 어느 곳이나 함께하고 계시다는 표현인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라고 해석하면 그다지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다른 번역본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 보시는 앞에서'(KJV), '하나님 전면에서'(NIV) 라는 표현으로 해석해서, '하나님에게'(to), '하나님을 향하여'(toward)라는 뜻으로 보게 되면 설교 사역의 기본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에게 전달하는 설교', '하나님을 위한 설교' 등으로 해석됩니다. 이것은 설교사역의 성격상 지니고 있는 '교훈을 주는 것', '가르치는 것', '경책하는 것' 외에 고려하고 살펴야하는 하나님을 향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에게 향하는 설교를 기준을 삼고 있을 때, 설교자는 혼잡한 말씀의 유혹과 그리고 안일함, 이기심, 오만함, 방자함, 타락의 위험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 일 뿐 아니라, 동시에 '청취하는 분'이기도 하다는 주장은 키에르케고르가 예배로서의 설교를 설명하면서 언급한 유명한 극장의 비유, 즉 설교자, 청중, 하나님의 위치는 극장 상황으로 비유하면 청중은 배우이고, 설교자는 배우에게 무대 뒤에서 대본을 읽어주는 프롬터인데, 청중과 설교자는 유일한 관객이신 하나님을 위해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이라는 비유에서 적절히 설명합니다.

칼 바르트도 설교가 하나님께 향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그는 설교는 기도가 되어야한다고 하면서 설교의 열매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는 가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바르트의 주장은 설교자들이 설교할 때 갖는 자의식을 문제 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됨을 성취하기 위해서 설교하는 순간, 높은 강단에서 설교함으로 하나님을 대신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진정한 설교자의 정체성은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인식할 때만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설교자에게 필요한 소명감과 윤리의식은 하나님 앞에서 설교하고 있는 자아 의식에서 유지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설교자의 초심은 목회 사역의 절박한 생존 현실의 벽에 부딪혀서 위축되고 왜곡되고 변형되기 싶상입니다.

필자가 보기에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의 빌 하이벨스가 보여주는 많은 사역 중에 놓치지 말아야하는 것은 설교 평가 시스템입니다. 그가 평가로 인해 자존심에 상처입고 자신의 자율적인 은사활용을 제한하면서까지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설교 피드백 시스템을 운영하는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목사가 그러하듯이 내가 정의롭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바로 그분께서 내가 하는 일을 평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마음은 고린도후서에 담긴 바울의 마음과 닮아 있습니다. 실망과 탄식으로 뒤덮인 한반도의 대림절 절기에 어느 때보다 순전한 설교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한국교회 교우들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말하노라'라고 선언하는 진실된 설교자들의 울림이 넘쳐나기를 소망합니다.

 

김세광 교수/서울장신대학교 예배설교학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