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앙리4세/종교전쟁 시대의 프랑스 왕

[ 김인주 목사의 이주의인물 ]

김인주 목사
2016년 12월 06일(화) 14:07

프랑스의 왕 앙리4세(1589-1610)가 1553년 12월 13일 태어났다. 부르봉 왕조의 첫 왕이 되었다. 낭트칙령을 반포하여 계속되던 신교와 구교의 충돌을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다.

성장과정에서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개신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종교갈등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1572년에 국왕 샤를9세의 누이동생과 결혼이 추진되었다. 화해한다는 명목으로 신교도들을 파리로 유인한 다음 몰살시킨다는 음모가 숨어 있었다. 이 사건이 성 바돌로매 축일의 학살이다. 앙리는 잡혀 구금되어 자유를 잃었고 천주교 개종을 강요받았다.

4년 동안 유폐되었던 앙리는 탈출하였고, 위그노를 규합하여 선봉에 서게 되었다. 전쟁이 지속되는 와중에 왕좌를 계승할 수 있는 우선순위자들이 차례로 사망하면서 앙리는 프랑스의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마지막 걸림돌이 되었던 신교도라는 어려움은 스스로 다시 천주교도가 되어서 해결되었다. 구교측의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서 앙리는 부단히 노력하였다. 어려운 시대를 벗어나면서 국력을 신장하기 위해 좋은 정책을 실시하였고 영민한 군주로 인정받았다.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첫번째 부인은 마르그리트였는데 동거할 기회가 없었고, 시종 원만한 관계도 아니었다. 역사에서 흔히 '여왕 마고'로 불리는 여걸이다. 왕은 호색한으로 많은 정부가 있었지만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중에 가브리엘은 앙리도 인정받기 원했던 배우자였다. 그러나 아이를 사산하면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그 다음에 결혼한 마리가 아들을 낳아 루이13세가 되었고 프랑스 혁명시까지 그 후손들이 통치가 지속되었다.

앙리는 평생 암살의 위협에 시달렸다. 왕실도 협력하지 않았고 천주교측은 늘 반대하였다. 결국 군주로서의 포부는 실현될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하였고 광신도의 손에 피살되는 최후를 맞았다.  


<봉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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