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공보 기획> '하나님의 선수' 윤태혁 장로

[ 교계 ]

신동하 기자 sdh@pckworld.com
2016년 12월 05일(월) 10:21

인생 후반전에 전반전과 같은 체력으로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하나님의 선수'가 있다. 몸이 제대로 풀려서인지 삶을 드리블하는 감각이 뛰어나다.

올해 72세인 윤태혁 장로(상도교회 은퇴)는 요즘 '브라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지난해 지인과 서울 인사동 갤러리에서 '70에 시작하는 사진과 그림 2인전'을 열어 화제를 모았다.

그는 종교적인 신념을 사실화와 모자이크로 부드럽고 따뜻하게 표현해냈다. 홍익대학교 미대를 수석졸업하고 디자인회사를 운영하는 등 상업미술에 치중해 온 그는 이제 순수미술, 특히 복음을 드러내는 작품활동에 에너지를 쏟을 생각이다.

"저는 70이 넘은 나이에도 꿈이 있고 비전이 있습니다. 하나님 주신 달란트로 더욱 왕성한 활동을 하고자 합니다. 이런 도전이 다른 분들에게 감동을 주어 전도까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하나님 주신 달란트로 '인생 제2막' 스타트를 끊은 윤태혁 장로는 패션감각이 뛰어나 평소 '멋쟁이 신사'로 정평이 나있다.

그는 지난해 기도문집을 내며 글쓰기에도 도전했다. 기도문집은 과거 어려움에 처했을 때 기도하고 응답받은 내용을 정리해 발간한 것이다.

윤 장로는 "사업과정이나 살아가며 지혜를 구할 때 기도문을 일기처럼 적어왔다"며 "살아온 기록이자 신앙생활의 발자취이기에 수시로 읽어보며 새로운 각오를 다지곤 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보면서 인내와 연단 후의 값진 열매들에 대한 감동을 계속 느끼고 있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그에게는 찬양이 일상이다. 한국장로성가단 단장을 역임한 그는 교회 새벽기도회 찬양대, 월요일 아카펠라중창단인 HIM중창단 연습, 수요예배 찬양대, 주일 1부예배 찬양대 등 거의 매일 찬양대 활동을 하고 있다.

윤태혁 장로는 서울 수송동에서 4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윤 장로가 먼저 복음을 접하고 훗날 부모형제 모두를 교회로 인도했다.

어려서 친구들과 나간 교회는 윤 장로에게 놀이터였다. 당시 교회는 먹을 것과 놀이 문화가 풍성한 어린이들의 천국이었다.

윤 장로는 "어렸을 때는 신앙 차원은 아니고 교회를 놀러갔다"며 "중요한 사실은 놀이를 하러 교회를 간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섭리아니겠는가 싶다"고 말했다.

이후 신앙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전도자들과 토론을 하며 성경에 대한 의문점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그에게 먼 나라 이야기였다. 성경을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풀어야 했다.

윤 장로는 "신앙은 논리싸움이 아닌데 똑똑한 척을 꽤나 했다"며 당시를 쑥쓰러워했다.

윤 장로는 홍익대 미대를 차석으로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심미안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미술을 정통으로 공부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겠다는 당찬 생각을 했다.

중고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미술반 활동을 하며 청계천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외국서적을 구해 탐독할 정도로 열성파였다. 외국문화를 접할 수 있는 패션이나 라이프 잡지를 탐독했다.

▲ 윤태혁 장로는 미술을 전공했지만 음악에도 탁월한 재능을 가져 성가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윤 장로는 "찬양하는 순례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사진 우측에서 네번째가 윤 장로.

미대에 입학하자 곧바로 집에서 쫓겨났다. 법계통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아들의 법대 진학을 희망했지만 뜻을 따르지 않자 "그림쟁이하려고 한다"며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윤 장로는 아버지에게 "미술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게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문화"라고 설득했지만 허사였다.

자취를 하며 학업을 이어가기란 쉽지가 않았다. 학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성적우수 장학금을 매 학기 놓치지 않았다.

윤 장로는 "혼자 힘으로 대학다니며 삶의 자세가 바뀌었다"며 "인생을 살아가며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대학생활을 떠올리면 힘이 났다"고 말했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며 문교부장관상을 받았고, 전공교수들이 훗날 교수요원으로 키우고자 조교생활을 추천했지만 윤 장로는 "틀에 박혀 삶의 활동범위가 넓지 않겠다"는 생각에 디자인연구소를 차렸다.

광고물 제작을 시작으로 화장품회사의 메이크업 진열대와 쇼윈도 제작 및 납품을 하며 잘나가는듯 했지만, 사회경험이 부족하고 자금력이 떨어져 문을 닫았다.

이후 유명 식품회사의 선전광고 담당으로 들어가면서 신앙의 터닝포인트를 맞는다. 당시 상도교회를 다니던 그는 '무늬만 신앙인'이었다. 그러다 회사에서 외부 견학자들이 오면 안내하는 일도 겸하면서 사내 교회를 자주 오가다 신앙에 꽃이 피었다.

사내 교회에서 30대 초반에 세례를 받으며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놀라운 감동과 은혜가 온몸을 타고 전해졌다.

윤 장로는 "세례를 받자마자 마치 가볍게 날아다니는 느낌이 들었다"며 "갑자기 생활이 기쁘고 즐거워지고 은혜가 무엇인지를 체험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사내 교회의 찬양대원으로 활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함명준 지휘자가 성남시공설운동장에서 열리는 부활절 찬양공연의 솔로파트를 윤 장로에게 권유하며 신앙의 터닝포인트를 맞는다.

"말도 안되는 일이었죠. 음악 전공자도 아니고 찬양대에 선지 얼마 안됐는데 솔로곡 제안을 받고 한달 간 잠을 제대로 못잘 정도로 두렵고 떨려 기도만 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의지하고 감당하겠습니다'라고만 했어요. 생애 최초로 열렬히 기도한 순간이었습니다."

윤 장로는 결국 해냈다. 4만명이 운집한 자리에서 성남시 부녀합창단과 찬송가 40장을 연합합창을 하다 2절을 솔로로 했다.

▲ 윤태혁 장로는 70이 넘은 나이에도 복음이 담긴 미술작품 활동에 에너지를 쏟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마련한 전시회에서 가족들과 함께.

이후 다니던 상도교회에서도 찬양대 봉사를 시작했다. 주변에서 목소리가 좋다고 칭찬이 이어지자 감사한 마음에 찬양으로 선교하는데 더욱 열심을 냈다.

그는 창단 31년 역사의 한국장로성가단 단장을 최근 역임했다. 60이 넘은 나이에 교회음악을 더 알고싶어 새문안교회 부설 한국교회음악원에 등록해 3년간 레슨을 받았다.

테너 파트인 그는 "호흡이 다하는 날까지 찬양하고 싶다.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며 찬양하는 순례자가 되고 싶다"고 강조했다.

윤 장로는 건설사 주택연구실장으로 국내 아파트 인테리어사에 큰획을 긋고 은퇴한 뒤 실내건축 인테리어 공사업을 거쳐 최근에는 컨설팅 사업을 하고 있다. 여전히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는 그다.

"제가 디자인 전문이니 인생을 디자인에 비유해볼까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디자인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부분 70세가 넘으면 마무리를 할 시간이라고 하지만 저는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날까지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인생을 계속해서 리모델링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한편 윤태혁 장로의 가족관계는 부인 이난숙 권사와 1남 2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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