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공보 기획> 창립 119주년 송마리교회

[ 교계 ]

신동하 기자 sdh@pckworld.com
2016년 11월 21일(월) 14:19
▲ 1897년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송마리교회. 주변지역 복음전파와 한국 근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 1897년 언더우드 선교사 설립, '송마리교회'
1890년대 후반, 조랑말을 타고 김포 일대를 전도하던 언더우드 선교사는 대곶면 송마리에 다다라 김상현의 6칸 초가집에 머문다. 그곳에서 기거하며 마을 사람들을 모아 성경공부와 선교집회를 열고 복음을 전했다.

1897년 11월 20일 언더우드 선교사와 전도인 신화순, 이춘경에 의해 송마리에 교회가 세워졌다. 김포 송마리 언덕에서 안동 권씨와 김씨 세도가들을 중심으로 번성했다.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산자뫼로 104번길 19-31에 위치한 서울서남노회 송마리교회(추진규 목사 시무). 현대인들에게 명칭조차 생소한 이 교회는 지금으로부터 119년 전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유서깊은 교회다.

한국교회대부흥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는 이 교회를 2007년 '100주년 기념교회'로 지정하고, 서울서남노회는 1985년 '서울서남노회의 어머니교회'로 결의했다. 이러한 역사적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외곽에 위치한 지리적 환경으로 사람들에게 잊혀져가며 성도 수마저 줄어 기도와 관심이 요청되고 있다.

그래도 불변의 표어를 '언더우드 선교정신을 이어가자'로 정하고 50여 명의 성도들이 초대교회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있다. 담임 추진규 목사는 계속해서 역사자료를 발굴하고 복원시키는 작업을 해왔다.

최근에는 초대 당회록과 제직회의록을 성도 출신 후손들에게 어렵게 구했다. 당회록은 6.25 동란 중에 파기될 것을 염려해 성도들이 피난가며 깊은 동굴 속 바위 밑에 숨겨놓고 훗날 찾은 일화가 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송마리 주변을 전도하면서 나팔수들을 모아 나팔소리로 마을사람들의 시선을 끌며 교회로 인도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양코비개가 왔다"며 구경나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새문안교회가 발간한 '원두우, 그 섭리의 발자취' 중 송마리교회를 언급한 부분에 따르면, "언더우드목사는 김상현의 집에 말을 매어놓고 2~3일 기거하며 성경공부, 선교집회와 예배를 드리는 동안 교인들은 풀을 뜯어다 말에게 먹이고, 언더우드목사의 불편한 잠자리를 생각해 나무로 침대를 만들어 주무시게 했고, 음식은 계란, 닭고기, 채소를 대접하며 초대 당회장을 섬긴다"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김상현은 초대장로였다. 김상현 장로는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며 성도들과 함께 양곡의 오라니장터에서 지역의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김상현 장로의 후손들은 최근까지 4대(代)가 교회를 섬겼다.

▲ 1915년 11월 21일 제작된 초대 당회록을 최근 송마리교회 추진규 목사가 출석성도 후손들에게 어렵게 입수했다.

현재 교회가 보관하고 있는 초대 당회록을 보면 "1915년 11월 21일에 제1대 당회장 원두우, 임시서기 신홍균 조사가 시무하여 초대장로로 김상현이 임직되므로 당회가 조직"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회록에는 당시 시대상 및 당회운영과 임무, 권징 업무 등을 알만한 자료들이 수록돼 있어 한국기독교사적으로 매우 귀한 자료로 평가된다. 개교회 당회록으로서는 새문안교회 당회록과 동시대 것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한 대목을 보면 18세 아가씨가 결혼을 했는데, 너무 일찍 했다고 당회에서 6개월 간 출석 정지를 하고 해벌한 치리 내용이 나온다. 또한 70세 노인이 세례를 앞두고 문답에서 떨어지자 '목사야, 이놈아 왜 나는 세례를 안주냐?"고 이야기 해 6개월 간 출석 정지 책벌을 받은 내용도 있다.

또한 송마리교회는 집사의 의무를 다룬 증서도 보관하고 있다. 이 증서는 한 집사를 임명하며 전도인으로 종사케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 교회는 문맹퇴치와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가 있다. 특히 김포지방에 10개 교회를 설립하는 등 주변으로 복음이 뻗어나가는데 산파역할을 했다.

교회를 거쳐간 지도자들도 많다. 제2대 당회장 차재명 목사와 제3대 당회장 군예빈 선교사는 새문안교회에 부임했다.

현재는 50여 명 정도가 교회를 나온다. 그중에는 2살 때 유아세례를 받고 80년 이상을 교회에 나오는 노(老) 권사들도 있다.

송마리교회는 비록 사람들에게 잊혀져가지만 역사적 자부심을 갖고 귀감이 되는 선교정신을 오롯이 지켜내고 있다. 지난 10월 11일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언더우드 서거 100주년 기념사업' 행사에 참석한 언더우드 4세 증손녀가 남긴 말이 송마리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 하다.

"설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리를 잘하고 가꾸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 올해 연말 은퇴를 앞둔 송마리교회 '지킴이' 추진규 담임목사가 기념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송마리교회 담임 추진규 목사
송마리교회 담임 추진규 목사는 12월 31일 정년은퇴를 맞는다. 1989년 제26대 당회장으로 부임해 몇년 뒤 독일 유학길에 올라 학업을 마치고 2004년 제29대 당회장으로 돌아왔다.

첫 부임 당시 이 교회는 지금도 그렇지만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지리적 한계로 성도 수가 적은데다 재정자립이 힘들었다. 추 목사는 '아골 골짜기 빈 들에도 간다'는 신념으로 이 교회에 부임했고, 독일 유학을 마치고 '언더우드 선교정신을 잇고자' 복귀했다.

추 목사는 "신학교를 다니면서 '1명이라도 모이는 시골교회가 날 필요로 한다면 가겠다'는 서원기도를 드렸다"며 "서원한대로 외진 곳에 오게됐고, 한국교회사의 기념비적인 곳에서 기쁨으로 목회를 해 감사하다"고 밝혔다.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문학사), 장신대 신대원, 연세대 교육대학원(교육철학 및 종교교육 석사), 대구 가톨릭대 대학원(철학박사), 독일 보훔대 대학원(철학박사 수학), 샌프란시스코 기독교대학교 대학원 졸업(Ph.D). 추 목사의 소위 말하는 '스펙'이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추 목사는 목양지를 선택할 폭이 넓었지만 송마리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큰 교회 청빙도, 교수 초빙도 마다했다.

추 목사는 사례비를 받으면 많지도 않은데 그것을 쪼개 교회학교 학생들 장학금을 지급해왔다. 어머니와 고등학교교사를 지낸 김순례 사모가 함께 헌금해왔다.

추 목사는 신학생 시절 성적우수자로 '한경직목사 장학금'을 받은 인연으로 본인도 빠듯한 살림에 다른 이들의 장학금을 책임졌다.

"기독교 전래역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뿌리를 보존하는 '교회 지킴이' 역할이 제 사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 많이 가지고도 배고픈 세상에서 한경직 목사님의 말씀처럼 '이것저것 쌓으려 하지 말고 오직 성경 한권 읽고 죽으면 된다'는 생각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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