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마틴 부처(Martin Bucer)-종교개혁을 주도한 신학자

[ 김인주 목사의 이주의인물 ]

김인주 목사
2016년 11월 01일(화) 16:27

마틴 부처(1491-1551ㆍ사진)는 11월 11일에 태어났다. 마틴 루터도 11월 10일생이다. 어린이를 사랑했던 성인 마틴을 기리는 축일이 11월 10일이다. 이때 태어난 아이는 대개 마틴이란 이름을 붙였다.

부처는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한 신학자였다. 16세기에는 신성로마제국 영토였고, 제국직할의 자유시였다. 당시에는 제네바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난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칼빈도 3년 동안 이곳에서 피난민들을 보살피는 목회자로 일하였다. 19세기 말에 프랑스가 차지하였고, 지금 유럽 의회가 자리잡고 있는 국제도시가 되었다.

부처는 도미니크 교단의 탁발 수도사였으나, 개혁자들의 신학을 따르면서, 1522년에는 수녀원을 떠난 여성과 결혼하였다. 1523년에 슈트라스부르크로 갔고 종교개혁의 지도자가 되었다. 개혁자들의 중요한 대변인이 되었고 대부분의 중요한 종교 회의에 참석하였다.

부처는 독일과 스위스의 개혁파 교회를 연합시키려는 노력을 통해 분리되어 있던 쯔빙글리파와 루터파 사이에서 중재를 하려고 시도했다. 쯔빙글리가 사망한 이후 1536년에는 비텐베르크로 루터를 찾아가서 성만찬의 절충안을 담은 협화신조(Concord)에 합의하였다.

하게나우, 보름스, 레겐스부르크에서 가진 카톨릭과의 협상을 위한 대표로서 활약하였다. 하지만 성공적인 결론을 도출하지는 못하였다.

슈말칼덴 전쟁에서 승리한 황제는 개신교의 개혁을 저지하기 위한 아우그스부르크 한시법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국면에서 부처는 1549년 슈트라스부르크를 떠나 영국 캠브리지로 가야 했다.

영국에 머무는 동안 크랜머가 '공동 기도서'를 발간하는 일에 협력하였고, 성공회의 신학 형성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는 1551년에 죽었으나 메리 여왕 치하에서 가톨릭이 득세하자, 그의 시체는 다시 파헤쳐져 불태워졌다.
<봉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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