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마틴루터 종교개혁의 중심에 서다

[ 김인주 목사의 이주의인물 ]

김인주 목사
2016년 10월 26일(수) 09:59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면죄부에 관하여 도전적인 대자보를 게시하였다. 비텐베르크 제일교회(성주교회)의 대문에 95개조의 논제를 붙였는데,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문은 당시 대학의 게시판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그 내용은 급속히 독일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새로운 미디어로 등장한 인쇄 출판의 기술에 힘입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다. 후대에 10월 31일을 개신교 탄생일로 지키는 것이 관례가 되었고 이 대자보 사건을 소재로 삼은 그림들도 수없이 생겨났다.

천주교의 대표적인 종교개혁사 연구자인 이절로는 이 날짜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야기의 출발은 멜랑히톤의 추모사였다. 그는 다음해에야 이 도시에 왔고, 사건의 목격자가 아니었기에 그 주장에 착오가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1962년에 제기된 이 주장은 오랫동안 논란의 주제가 되었다. 20세기 독일 신학계에서 이만큼 많은 논문을 만들어낸 주제는 없다. 개신교의 학자들에게는 매우 당황스러운 도전이 되었다. 많은 논쟁이 예외 없이 이 게시판에 대자보를 게시하여 진행되었는데 면죄부 논쟁만이 다른 경로를 거쳤다는 생각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는 정도로 반박이 되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서 게오르그 뢰러의 메모가 발견되었고, 개신교 측의 주장이 결정적인 힘을 얻었다. 그의 메모에는 10월 31일에 논제가 게시되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뢰러는 루터의 문하생으며 비서로서 최측근이었다.

탁상담화나 갈라디아서 강해 등 루터의 글이나 말이 그의 기록을 통하여 전해진다. 이로써 루터 생전에도 자주 10월 31일의 사건에 대한 회상과 대화가 있었다는 증빙자료가 발굴된 셈이다. 1년 남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놓고서 비텐베르크와 독일 그리고 세계의 개신교가 셀레는 마음으로 행사들을 준비하고 있다.


<봉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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