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공보 기획> '7전 8기의 인생' 박정곤 장로

[ 교계 ]

신동하 기자 sdh@pckworld.com
2016년 10월 25일(화) 10:41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6)

수원영은교회 박정곤 장로의 삶을 관통하는 성경구절이다. 고난이라 여겨지면 이 말씀을 붙잡았다. 보통사람 같으면 몇 번이나 고꾸라질뻔한 역경을 버텨낸 건 이 구절을 믿었기 때문이다.

박정곤 장로는 20세에 간디스토마 발병, 사업 부도 후 무일푼 단칸방 살이, 교통사고로 뇌 손상, 후각 마비, 뇌출혈, 신장 이식, 피부암인 카포시육종 발병 등을 겪었다. 한계상황에 봉착한 일들이 많았지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며 결국 '잿더미 속에서 핀 꽃'이 됐다.

"지금은 견디기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들이 축복의 시작이었음을 고백하지만, 당시 나를 포함해 우리 가족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 건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며 주님 뜻대로 살기를 다짐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경북 포항 출신인 박 장로는 일가친척 중에 처음으로 교회에 출석한 '첫 믿음'이다. 아버지 형제 중 자녀가 없던 큰집에 양자로 들어가 5살 무렵, 어린 나이가 무색하게도 친구들과 포항대송교회를 제발로 찾아가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박 장로는 "우리 집안은 미신을 믿고 굿을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꼬마였을 때 교회로 인도됐다"며 "학창시절은 '순둥이'였다. 말썽 한번 없이 학교 생활을 했다"고 회상했다.

▲ 굴곡진 인생을 살면서도 신앙의 동반자인 부인 조명희 권사가 있어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하는 박정곤 장로.

박 장로는 학창시절에 대해 말하기를 "똑똑하고 잘난줄 착각하며 살았다"며 "교만이 넘쳐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하나님 없이도 살만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고백했다.
이후 20세 때 당시만해도 발병하면 죽는다는 간디스토마에 걸렸지만 살아났다. 박 장로는 이 일을 계기로 낮아지고 겸손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영남대 법학과 졸업 후 누구나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2년 만에 사표를 던지고 유통사업을 시작했다. 주택을 담보 잡히고, 처가집에 손을 벌려 사업을 벌인 결과, 처참하게 무너졌다.

살던 집은 물론 처가에서 소유한 집 2채까지 모두 날렸다. 이 때 친척들에게 빌린 돈은 20년에 걸쳐 나누어 갚았다.

박 장로는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 잘난 맛에 사는 '헛똑똑이'였다"며 "대기업에 입사한 것도 똑똑해서가 아니라, 당시 경제 성장 때문임을 모든 것을 잃어버린 뒤에야 알았다. 교만이 문제였고, 더 큰 잘못은 하나님을 멀리했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가산을 탕진하고 처가살이를 하다 신문광고에서 강남사회복지학교 (현 강남대학교) 행정직원을 모집하는 것을 보고 응시해 합격했다. 손위 동서의 지원으로 학교 인근 수원에 100만원짜리 방 한칸을 마련해 온 식구가 이주했다.

"새벽에 두살배기 아들이 고열에 시달리며 몸부림쳐도 택시비와 병원비가 없어 집에서 울부짖으며 기도할만큼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습니다. 가난을 모르던 아내가 근검절약하기 시작했습니다. 직장에서 적은 급여를 받았지만 친척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절반 이상을 저금했습니다."

이 시기에 신앙적으로 정신이 '번쩍'들며 가정예배를 시작했다.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철야, 주일 성수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교회학교 교사 봉사도 시작했다.

▲ 박정곤 장로가 출석하는 수원영은교회 담임 권영삼 목사와 함께 자리했다. 수원영은교회는 박정곤 장로가 고난을 겪을 때마다 기도로 후원했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이 눈앞에 펼쳐지려던 1990년 1월, 직장이던 학교가 정규대학으로 개편되면서 야근을 하고 저녁 늦게 승용차로 퇴근하다가 눈길에 미끄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쇠기둥을 들이받은 승용차는 완파되고, 박 장로는 우뇌를 크게 다쳤다.

급히 실려간 동수원병원에서 생존 가능성이 없다는 진단을 받고 강남성모병원으로 이송했으나 역시 생존확률이 희박해 중앙대필동병원으로 이송됐다. 우여곡절 끝에 머리 절개수술을 받고 1주일만에 의식을 되찾았다.

박 장로는 "두 달간 아내가 내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다"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아내의 헌신적인 간병으로 회복이 빨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퇴원 7개월 후 후유증으로 뇌출혈이 일어나고, 또다시 3년 만에 후각을 잃었다. 그럼에도 박 장로의 입에서는 찬송이 흘러나와 본인 스스로도 어리둥절해 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의 입에서 나온 찬송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였다고 한다.

그러다 2002년 체중이 비정상적으로 감소해 병원을 찾은 그는 청천벽력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신장 양쪽이 90% 이상 상실돼 이식 또는 투석이 필요했고, 3년간 복막투석을 하다 신장 기증을 받아 새 삶을 살게 됐다. 거저 얻은 삶에 감사하는 의미로 박 장로는 '사후 신체 기증'에 서약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2010년에는 일종의 피부암인 카포시육종이 발병했다. 다리 피부가 새카맣게 죽었다. 이름도 생소한 병을 위해 교회 중보기도팀과 지인들이 기도로 도와 최근 치유가 됐다.

박 장로의 '움직이는 종합병원' 간증은 일가친척에게 전해져 불교집안의 구성원 80% 이상을 기독교인으로 변화시켰다. 투병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무엇이 그를 이토록 감사하게 만드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증을 알려 전도의 기회로 삼고자 현재 남선교회전국연합회 전도단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는 주어진 달란트를 활용해 남선교회전국연합회에서 부회장과 감사 등도 지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나를 굳세게하고 의로운 오른손으로 붙드시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염려하지 않으니 구한 것을 주시는 신실하신 언약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한편 박정곤 장로의 가족관계는 부인 조명희 권사와 슬하 1녀 1남이 있다.

교계경력으로는 경기노회 회계를 역임하고 현재 부노회장이며, 총회에서는 평신도지도위원회 회계와 선거관리위원회 회계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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