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회 총회 주제 해설 ③종교개혁의 교회사적 배경

[ 특집 ] 개혁, 잘못된 교회 향한 회개의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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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18일(화) 09:57

루터는 교회의 개혁을 상대화하지 않았다. 교회란 자기 자신이다. 상대방에게 개혁하라고 비판하고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변화하게 하는 것이 교회개혁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 글에서는 종교개혁의 교회사적 배경을 총회의 주제에 맞추어 '교회'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상황이 어떠하였는지,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이 교회개혁을 통하여 복구하려던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중세기 교회의 신학은 스콜라주의 신학이었다. 보편논쟁이나 성례전 효능 논쟁 등 스콜라주의 신학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신앙적 신비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이성으로 해결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성(ratio)이란 것이 결코 무시할 수도 없고, 무시해서도 안 되는 중요한 신앙의 한 요소이지만, '오직 이성'이라는 주류 스콜라주의의 신학방법은 '오직 성서'(sola scriptura)를 외친 루터의 주장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틴 루터가 1520년에 쓴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개혁문서에는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것과 '교황만이 오류 없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가톨릭교회의 주장에 대한 강한 비판의 내용이 담겨있다.

루터의 이런 주장 뒤에는 중세 교회사의 두 가지 사건이 숨어있다. 첫째는 교황청 분열로 인한 우주적 지배권의 상실이라는 역사이고, 둘째는 공의회주의 운동이 지닌 교회개혁적 영향력의 역사이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등장하던 시기는 교황교회 대분열의 시대였다.

교황의 우주적 지배권 상실은 공의회주의 운동으로 나타났다. 공의회는 교황과 교황청 성직자단 중심의 단일지배권 대신에, 공의회를 소집하고 다양한 견해를 수렴하는 집단적 의결권을 주장하였다. 루터가 교황의 단독권한에 대하여 항거할 수 있었던 것도, 중세 후기 로마교회 교황청의 대분열이라는 교회적인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황의 우주적 지배권을 교황수위권이라고 부른다. .
세속권세에 대한 포기를 요구하는 신학자들의 주장 외에도, 교회의 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한 인물이 위클리프와 후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후기 중세기의 교회부패 가운데에 성직매매를 신랄하게 비판한 사람이 이 두 사람이다. 후스는 보헤미아 출신으로 프라하 대학의 총장을 지낸 사제였는데, 위클리프의 사상에 감동을 받아서 교회개혁을 시도하다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심문받고 이단으로 화형당한 인물이었다. 

그는 '교회론'이라는 글 속에서 교황을 베드로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므로 교황의 우주적 지배권이나, 수위권은 교회 안에서조차도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자 루터에게서 나오는 '오직 성경'이란 표어도 같은 맥락에서 출발했다. 루터가 발표한 95개조 면죄부 반박문의 내용이 단지 면죄부 판매를 반대한 것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지만, 실상 이 문서는 회개를 촉구하는 문서였다. 

종교개혁적인 문서를 담은 여러 권의 저술을 발표하고 나서 루터는 보름스 제국회의(1521)에 소환당하여 심문을 받았다. 

이미 1518년 아욱스부르크에서 추기경 카예탄의 심문 때에도 교회의 보화(Thesaurus ecclesiae)이론에 반대했기에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지만, 자신의 목숨이 위협당하는 현실 앞에서 주저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루터는 성경과 양심에서 나온 확신으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 용기를 발휘하였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루터의 깨달음은 1515~1516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로마서를 강의하던 때에 얻은 것인데, 루터가 갑자기 이것을 주장하게 된 것은 후기 중세 가톨릭교회의 해석이 달랐기 때문이라는 증거가 된다. 과연 가톨릭교회 신학은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가르침이 없었을까?

사면선언으로 완성되는 고해성사 중심의 성례전 신학은 신자들에게 형식적인 신앙행위 참여로 속죄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연옥에 관한 교리제정과 연옥에서의 보속행위의 고통을 강조하여,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의 공포를 극대화 하였다.

그래서 95개 조항의 첫 번째 조항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회개하라'고 하신 의도는 신자의 전 생애가 회개의 생애여야 한다는 것이다."(논제 1) 전적인 회개의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명령인데, 교회는 이것을 외적인 형식으로 만들었고, 결국 루터는 사면선언에 필요한 보속행위를 대신할 면죄부를 만들어 이를 판매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고해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만 더 증가하는 수도사의 현실 앞에서 루터는 성서를 연구할 기회를 얻었고, 열정적인 성서 연구과정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를 깨닫는 순간, 자신에게 하늘 문이 활짝 열린 것 같았다고 그는 술회하였다. 그가 깨달은 것은 회개하는 삶의 종착점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라는 것이었다.


당시 교회 역사 속에서 반드시 언급해야할 신앙과 실천의 개혁 배경들이다. 

지나친 이성중심의 신학 때문에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군림하게 하고, 교회의 계급구조와 그 정점에 있는 교황이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신학과 신앙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여야 하는데, 교회가 정한 규율을 내세워 신자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상황이 종교개혁의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성직매매와 면죄부판매, 나아가 성직자의 타락은 본질적인 종교개혁의 배경이 아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된 시대적 정황과 신학적 오류와 교회의 상태가 종교개혁의 교회사적 본질적인 배경이다. 

교회와 교황이 세속권세를 지배하기 위해 끝없이 투쟁한 것도 실패했고, 이성으로 신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던 스콜라주의 신학도 다양하게 분화했고, 민족 중심의 국가주의가 등장해 정치적 신앙적 통일성이 무너진 시대에 맞추어 등장한 종교개혁자가 바로 마르틴 루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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