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헷센의 백작 필립/야망의 화신

[ 김인주 목사의 이주의인물 ]

김인주 목사
2016년 09월 20일(화) 13:57

1529년 10월 1일 마르부르크에 종교개혁을 주도하는 신학자들이 모두 모였다. 독일에서는 루터, 멜랑히톤, 요나스, 오지안더, 브렌츠, 아그리콜라 등이 등장하였다. 스위스 혹은 독일 남부에서는 쯔빙글리, 부처, 오이콜람파드, 슈트룸, 헤디오 등이 참여하였다. 가히 개혁을 표방하는 양대 진영이 겨루는 올스타전이라 할 만큼 찬란한 장면이 되었다.

누가 불렀기에 쟁쟁한 신학자들을 한 걸음에 달려왔나? 헷센의 백작 필립(1504-1567)이었다. 작위로 본다면 서열이 더 앞서는 선제후, 공작들도 독일 땅에 적지 않았다. 하지만 필립은 현실에서는 독일의 왕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지도력이 있었고, 야심도 컸다. 비텐베르크에서도 그의 끝없는 야심을 걱정하며 "마케도니아 사람"이라 별칭으로 불렀다. 정복왕 알렉산더와 그 아버지 필립이 얼른 연상된다는 뜻이다.

양측은 먼저 루터와 부처, 멜랑히톤과 쯔빙글리가 의견을 조율하도록 기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양팀의 주장 루터와 쯔빙글리가 담판을 짓는 구도였다. 토너먼트 시합에서 준결승에서 결승으로 이어지는 느낌도 든다. 이미 확연히 드러난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중도적이며 폭넓은 사고가 가능한 부장들과 먼저 만나도록 한 것이다. 상대방에 대하여 사전에 탐색하고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작전이었다.

이 만남은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루터는 양보할 뜻이 애초부터 전혀 없었다. 쯔빙글리는 설득할 수 있다고 자신하였지만 일방적인 희망사항이었다. 입장의 차이만 확인한 채 어설픈 양해각서 비슷한 문서를 만들었다.
1536년에야 부처가 비텐베르크를 방문하여 합의된 결론을 만들어내었다. 하지만 논쟁은 끝난 게 아니었다. 그 불편한 대립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고 작동하고 있다. 
<봉성교회>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