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재판, 철저한 개혁이 시급하다.

[ 기고 ] 아수라장이 된 재판정

서성환 목사
2016년 09월 07일(수) 15:21

지난 7월 12일 제주노회 기소위원장으로 총회 상고재판에 참여하였다. 그날의 총회 재판정은 앞서 열린 재판분규로 고성과 몸싸움이 난무한 난장판이었다. 도무지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최고 재판정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총회재판국은 자폭하라!”, “총회를 해체하라.”, “평신도들이 깨어서 목사들을 감시해야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참람한 말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아무의 말도 듣지 않고, 지원 나온 경찰들도 속수무책이었다. 방청석에서 복도로 떠밀려 나와서도 분을 삭이지 못한 사람들은 성토를 계속하였다. “다섯 번 방청을 하면서도 우리는 한 마디도 안하고 지켜만 보았다. 그러나 이건 도저히 재판이라고 할 수도 없다.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다.” 큰 충격 속에서 주님의 몸된 교회가 고통을 당하는 쓰라린 아픔과 함께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 재판이란 무엇인가?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하면서 재판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 의아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용서받은 죄인들이 하는 신앙생활이고, 교회생활이어서 많은 갈등과 다툼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 신앙적으로 교회법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재판이고 교회 권징이라 할 수 있다. 일단 재판에 부쳐진 이상 교회법적인 절차와 형식과 법리에 따라 신속하게 재판이 이루어져야 권징의 본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재판의 권위는 이 상식(절차, 형식, 법리)이 공정하고 차질 없이 지켜져야 세워지고, 재판 당사자들이 승복할 수 있게 된다. 법이 정한 절차와 형식이 무시된 채 진행된 재판은 정당성이 있을 수 없다. 정확한 법리 보다는 정실에 따른 소위 은혜를 앞세운 온정주의와, 소위 교회적-목회적 배려라는 구실과, 적당한 정치적 타협으로 너무나도 자의적인 판단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실정이라 하겠다. 무엇에도 치우치거나 영향 받지 않고 엄정한 법적인 판단을 해야 할 때, 법리와는 무관한 너무나 많은 요소들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도 승복하지 않는다.

왜 교회 재판이 그렇게 되는 것일까?

일차적으로 낡은 법과 제도와 비전문적인 재판국에 무거운 책임이 있어 보인다. 현재 헌법 권징은 오늘의 교회 안의 갈등과 다툼의 현실을 감당해 낼 수 없어 보인다. 현재의 권징 체계는 고발에 의해 기소위원회가 기소를 해야 재판이 열리는 형사적 성격의 체계로 되어 있다. 민사적인 성격의 다툼은 다룰 수도 없다. 형사적 성격의 다툼에서는 단죄와 무죄 사이의 판단만이 있을 수 있다. 형사적 성격의 다툼에서 쌍비론적 관점에서 신앙을 내세워 무조건 화해를 종용하는 건 바른 재판을 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형사적 성격의 다툼에서는 시시비비를 법률에 의해 정확하게 판단하고, 판단이후에는 신속한 판결집행(시벌)이나, 당사자들 간의 회개와 용서가 있을 뿐이다. 적당하게 얼버무리는 절충을 화해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런 본질적인 문제 뿐 아니라, 현행 권징법은 범죄의 구성요소, 양형의 실효성, 양형의 기준, 수사권, 재판 절차법, 재량권의 범위, 재판행정과 관리 등등에서 많은 허점을 가지고 있어서 제대로 된 재판을 하기가 매우 어려워 보인다.

또한 비전문적인 재판국은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요인이라 생각된다. 총회 재판국은 총회 총대 중에 지역 안배를 고려한 공천에 의해 15인으로 구성된다. 계속 총대로 파송 받으면 3년직이고, 1년직인 경우도 허다하다. 재판국 전문위원이 위촉되어 있지만 활용은 거의 없어 보인다. 총회 재판국원 절반은 현직 목회자들이고, 절반은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는 장로들이다. 이들이 자신의 목회나 생업을 포기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는 한, 폭주하는 총회 재판업무를 제대로 감당하기는 애초부터 무리인 셈이다. 상고장이나 답변서를 꼼꼼히 읽고 재판을 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법과 재판운용에 대한 자질은 차치하더라도, 이런 비전문적이고 자기 일에 바쁜 재판국원에게 너무나도 막중한 권한과 책임이 주어지는 것은 합당한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재판국에 끊임없이 제기되는 정실재판의혹, 뇌물수수의혹 등은 이런 토양에서 생긴다. 거기에 상설 재판정도 없다. 재판을 세미나 하듯 빙 둘러 앉아 한다. 재판의 권위를 갖출 수가 없다. 또한 총회 재판국에는 자체 행정사무국도 없다. 총회 행정지원본부에서 지원하는데, 재판에 합당하지 않는 문건들이 아무 여과 없이 접수되고 분배된다. 재판의 격과 질을 떨어뜨리며 재판을 지루하고 어렵게 만들고 있는 요인 중에 하나다.

어떻게 재판 개혁을 할 것인가?

문제에 답이 있다. 먼저 헌법 권징 부분에 대한 전면적인 개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전문적인 연구와 협의와 의견수렴을 통해 우리 시대의 교회 안의 다툼을 감당해낼 만한 효율적인 법과 재판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환골탈태가 필요하다. 권징법에 대한 전면적인 개정 전이라도 특별법을 만들어 우선 전문 전임재판관을 세워야 한다. 법조 능력이 있고 전문적인 경험을 가진 전임재판관을 세워 그들이 단독으로 또는 합의체로 재판을 주관하게 하고, 현재 총회에서 공천에 의해 선임되는 재판국원은 배심원으로 참여하게 해야 한다. 물론 총회 상설재판정도 마련해야 하고, 재판국 행정사무를 총괄할 재판사무국도 법의 근거 위에 함께 세워야 한다.

이런 개혁은 많은 노력과 재정이 수반되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런 개혁을 하지 않으면 신앙과 교회 내외의 첨예하고 어려운 많은 갈등과 다툼을 감당할 수 없게 되고, 교회는 질서와 활력을 잃고 계속해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자동차를 정비하지 않고 계속 탈 수는 없다. 정비소를 세우는 비용을 아끼려고 정비소도 세우지 않고 자동차를 계속 운행한다면, 그 결과는 명약관화하다. 자동차들이 사고 등 수많은 문제를 일으킬 때 구멍가게 같은 카센타로는 감당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제대로 된 정비소를 세울 때 오히려 비용도 절약되고 보다 확실한 안전도 보장되게 것이다.

다시 거룩한 교회로 ! 철저하고 신속한 재판 개혁을 촉구한다.

신앙생활과 교회 생활에서 재판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재판이 시작되면 개 교회나 노회나 총회는 오직 신앙과 교회법에 따른 신속하고 바르고 공정한 재판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를 방치한다면 성도와 교회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되고, 교회는 질서와 거룩을 잃어버리고 우리 시대에 맡겨진 선교적 사명을 바로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다시 거룩한 교회로 세우는 구체적인 길을 고민하고 결단할 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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