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9월 5~10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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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8월 31일(수) 17:56

월-온전하라
본문 : 마 5:43~48
찬송 : 401장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온전할 수 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라는 말씀대로 인간과 비기는 상대적인 잣대가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로서, 그리고 아버지의 온전하심이 우리의 기준이어야 한다. 내 힘과 재능으로 할 수 있을 때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때 온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문의 산상수훈은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제자들과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은 신자에게만 가능하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이 세상을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사랑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녀된 우리에게도 이 사랑을 요구하신다. 자녀된 우리는 아버지를 닮는 것이 당연하다. 이 때 우리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나도 온전해지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이 땅에서 우리가 사랑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온전하여 지는 것이다.
 
더하는 수고를 할 때 온전할 수 있다.
 
요즘 말로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 모이고 사랑을 나누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언인지 알고 늘 기도하면서도 더하는 것이 없다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닐 수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온전한 사람은 더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사랑의 지평이 넓어진다. 관계를 맺는 기준이 사라지고 누구든지 품을 수 있다. 문제 뒤에 역사하시는 주님을 바라볼 때 온전할 수 있다.


스데반은 공회에 앉은 사람들에게 천사의 얼굴로 보였다.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이었으며,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한 사람이었다. 공회 앞에서 스데반은 당당하게 설교했다. 그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은 마음이 찔렸다. 그런데 그들은 회개한 것이 아니라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고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 때 스데반은 무엇을 바라보았을까?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하나님 우편에서 일어나 자기를 응원하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볼 때 기도할 수 있었고 순교할 수 있었다.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는 훗날 바울에게는 잊을 수 없는 큰 사건이었다. 스데반의 설교의 핵심이 모두 다 바울의 신앙의 주춧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스데반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고난이 아니라 고난 뒤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보았기에 온전히 천사의 얼굴을 간직했다.
 
오늘의 기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주님의 명령앞에서 온전함을 이루어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윤석원 목사
평강교회

화-예수님께서 가시는 길
본문 : 막 10:32~34
찬송 : 349장

예수님의 공생애 중 최고의 장면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예고하신 말씀이다.


인간은 누구나 욕망이 있다. 유대인들의 정치적 욕망이 민족적으로 통합을 이룩할 수 있는 여건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언된 메시아를 기다려 왔다. 그 메시아는 조상 다윗 왕의 후손으로 오시며 그 왕조를 이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새 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했다. 그리고 마침내 소망을 보게 되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의 욕망을 채워주기에 충분함을 보여 주셨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소망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기대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난을 미리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들의 욕망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 후에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러 나귀새끼를 타시고 성 안으로 들어가셨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왕이 아닌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는 그리스도 사명의 길을 택하셨다. 우리도 이 세상에 살면서 육신의 욕망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나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자.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고난의 길을 가셨다. 예수님의 기도의 중심은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였다. 종려나무가지를 길에 펴고 "호산나! 호산나!"를 외치며 환영하는 무리들 가운데로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온 성이 소동하였고 바리새인들은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고 탄식하고 있다. 또 어떤 헬라인들은 예수님을 뵙기를 간청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것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메시아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소망을 따른다면 예수님께서 얼마든지 영광을 누리실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영원한 영광을 선택하셨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가면 영원한 영광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이미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섬기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처럼 사명에 의해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영원한 영광을 위해 섬기고 희생하는 거룩한 결단을 해야 한다.
 
오늘의 기도
 
이 시대의 욕망을 따르게 하는 많은 유혹으로부터 이기는 마음을 주셔서 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대중 목사
고당교회

수-예수님과의 만남이 축복이다
본문 : 눅 9:37~43
찬송 : 530장

귀신 들린 아들 때문에 예수님을 찾았던 아버지가 있었다. 이 아들이 왜 귀신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는지 그 정확한 이유를 성경은 말씀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 아들에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틈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마귀에게 틈을 보이면 마귀는 우리의 것을 도둑질하고 우리를 죽이고 우리를 멸망시킨다(요 10:10). 따라서 우리는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병이 있으면 약이 있듯이,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도 있는 법이다.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이 아들은 귀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이 아들의 아버지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 결과, 마침내 이 아버지와 아들은 지옥과도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보다 더 큰 기쁨, 이보다 더 큰 행복이 또 어디에 있을까? 예수님과의 만남은 이들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기 전에,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다(눅 9:40).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주신 능력과 권위가 있었다(눅 9:1). 그래서 이들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고 병을 고쳤다(눅 9:6).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세상은 하나님의 역사가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통해서 일어나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 필요하다(마 17:20). 작지만 살아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나는 약해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게 될 것이다. 나 때문에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생기고, 나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이 생기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축복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만난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전하는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겠습니다. 오늘도 저와 함께 해 주시고 저를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신제 목사
새빛교회

목-쉼
본문 : 출 20:8~11
찬송 : 91장

고대사회에서 '쉼'이란 신이나 신의 대리자인 통치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안식일 하루만이라도 모두가 평등하게 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성서는 남종이나 여종들에게 안식을 허락하라는 명령을 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를 평등하게 여기라는 의미가 있다. 심지어 가축이나 하인들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안식일 계명은 부모, 자녀, 고용자와 피고용자, 원주민과 이주민, 인간과 동물이 함께 휴식하며 똑같은 삶의 권리를 누린다. '안식하다'는 히브리어로 '사바트'인데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그치다' '멈추다'이고, 다른 하나는 '쉼'이다. 안식이란 하던 일에서 '손을 떼는' 행동을 의미하기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사역에서 손을 놓으셨기 때문이다. 또 다른 뜻은 '쉼'이다.


엿새 동안의 창조 사역을 마치신 후에 쉬셨던 하나님은 인간에게도 똑같이 육일 간의 노동 후에 쉴 것을 요구하신다. 이처럼 안식일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동물들과 생물들을 포함한 하늘과 땅의 전체 창조도 포함된다. 모든 창조의 사역이 '안식일' 때문에 이루어졌기에 안식일은 '창조의', '끝이 없는', '완성의', '구원의' 축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의 면류관은 기존의 주장과는 달리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에 있다.
 
한편, 매 칠년마다 지키는 안식년 역시 땅과 종들과 짐승들까지 휴식할 수 있게 한다. 그 목적은 가난한 자, 힘없는 자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사회적 관심에 있다. 일곱째 해에는 갈지도 말고 묵혀두어서 백성 중 가난한 자들이 먹고 그 남은 것들은 들짐승이 먹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년은 이처럼 사회의 기틀을 형성하는 질서이고 사회를 세우는 법칙이었다.
 
일곱번째 안식년 다음에 오는 희년은 안식년의 확대 개념으로 희년에는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이 때 가난한 자들의 빚을 면제해 줘야 하며, 가난하여 자기의 몸을 판 종들을 해방시켜야 한다. 땅의 권리와 인간의 권리, 모든 자연의 권리가 회복되고 편중된 부가 사회로 환원됨으로써 가난한 자들의 인간적 가치와 생명의 권리가 회복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안식일, 안식년, 희년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가장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 자살률 1위, 노동시간 2위, 노인빈곤율 1위, 남녀 임금격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생명에 대한 가치와 권리가 무너져 내렸다. 이는 근본적으로 인간중심적 사고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의 가치와 권리가 인정받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이다.
 
오늘의 기도
 
팽목항에서도, 성주의 군민들도, 힘겨운 생존의 투쟁을 벌이는 비정규직 모든 이웃들이 가치와 권리를 인정받는 창조의 축제로, 완성으로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쉼이 있는 계절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영옥 목사
새성교회

금-행복한 관계가 힘이다
본문 : 행 18:1~11
찬송 : 399장

21세기는 인간관계를 얼마나 잘 유지하고 운영하는지가 중요한 시대이다. 그것을 잘 드러내는 지수로 공존지수(NQ)가 있다. 이는 현대사회가 수평적 관계를 맺는 '네트워크'사회로 발전하면서 다른 사람과의 소통 및 관계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의 시대는 혼자서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관계가 깨어져서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오늘 본문의 사도바울도 그러하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전도사역을 시작하면서 약해졌고 두려움 속에 떨고 있다. 그의 고통은 지금까지 진행된 전도사역에 대한 극심한 반대와 고린도에서 경험한 문화적인 충격으로 인한 것일 수 있다. 또 하나의 두려움은 고린도에 혼자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셨다. 하나님은 바울을 혼자 두지 않으시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게 하셨고 큰 힘을 얻게 하셨다. 이와같이 우리의 삶 속에서 누군가와 공존을 통해 행복한 관계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공존의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경건한 형제자매들과의 만남이 필요하다. 바울은 전도를 하는 중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게 된다.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나의 동역자'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이라도 내놓을 정도'라며 칭찬하고 있다.
 
둘째, 어떤 비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사도바울은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님을 믿으며 나아갈 때 핍박, 환란, 죽음까지도 예상했을 것이다. 고린도지역에서도 여지없이 어려운 일이 찾아왔다. 사도 바울이 당한 비방은 매우 모욕적이고, 명예를 훼손당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사도바울은 흔들리지 않고 복음을 힘 있게 증거한다. 우리도 오해로 인한 일로 비방을 받을 수 있다. 그 때, 그 비방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을 점검해야 하고,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은 철저히 배격하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행복한 관계를 위해서 주님의 음성을 붙잡는 믿음이 필요하다. 사도바울은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헬라어로 '성령에 의해'라는 뜻이고, '붙잡혀'는 '결합하다, 열중하다, 강권하다'는 뜻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 성령과 연합되어 있었다. 그런데 성령과 연합해서 담대했던 사도바울에게도 박해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 순간 하나님은 귀한 종의 필요에 대해 환상으로 응답해 주시고, 말씀으로 격려해 주셔서 바울이 더욱 더 담대하게 사역할 수 있었다. 우리도 주님과 행복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 강력한 삶을 살 수 있다. 모든 행복한 관계는 주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됨을 기억하자.
 
오늘의 기도
 
우리 안에 깨어진 관계들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영춘 목사
호계교회

토-이 언덕을 넘어야 하는데
본문 : 빌 4:2~3
찬송 : 412장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선 우리와 화목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지 않았는가? 교회나 가정에서 불화가 생겼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다…(시133:1~3)"고 했다. 즉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을 보고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다.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다투지 않고 화목하게 사는 것이다. 성경을 읽다보면 사람이 영광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라."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거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사람이 영광에 이르는 길'은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다.
 
내 안에 갈등은 없는가? 혹 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험담을 하거나 쉽게 다투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갈등의 언덕을 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심령에 평안이 없고 성령의 역사도 가로막힌다. 2000년 빌립보교회에도 갈등이 있었다. 빌립보교회의 여성 지도자 유오디아와 순두게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그런데 전체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읽히는 편지에 두 사람의 이름이 거론한다. 이는 작은 갈등이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본인들에게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간절히 권면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은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한없이 의로우신 분이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 같은 죄 많은 자를 존중하시고 그들의 무지와 실수를 참아주셨다.
 
바울이 동역자(디모데)들에게 화해하도록 도와주라고 권면하는 과정이 참 지혜롭다. 성도에게도 믿음의 동역자, 후원자가 필요하다. 교회는 혼자 지기 힘든 짐이 있으면 함께 져줄 책임이 있다. 그리고 교회의 권위 아래 조언과 중재를 받아들여야 한다. 바울은 주위의 글라멘드와 다른 성도들까지 갈등이 확대되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다. 비본질적인 문제로 다툴 때 에너지는 낭비되고 마귀는 기뻐하며 교회 힘은 약화되고 복음의 확장이 가로막힐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아버지의 자녀요, 신랑 되신 주님의 신부이다. 갈등하고 분열된 이 세상에 사랑과 하나됨을 선물하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자.

오늘의 기도
 
저희들의 연약함을 도와주소서. 심히 경사진 언덕이라 할지라도 거뜬히 올라갈 수 있도록 예수님을 바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권정희 목사
하늘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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