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공보 기획> 김용재ㆍ홍기숙 장로 부부

[ 교계 ]

신동하 기자 sdh@pckworld.com
2016년 08월 23일(화) 15:10

신약성서에 수차례 언급되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사도바울의 동역자로 전도활동을 돕고, 아볼로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고, 자신의 집을 예배처소로 제공하고, 로마의 교회를 섬겼다.

이 부부는 성경에서 항상 나란히 언급된다. 주님을 향해 같은 신앙과 목표를 가지고, 평생을 본이 되는 부부의 모습으로 살았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처럼 오직 '선교'에 열정을 바치며 그 여정이 고될지라도 숙명처럼 여기며 묵묵히 걸어가는 부부가 있다. 전례없이 부부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임원을 역임하고, 평신도 양대기관인 남선교회전국연합회 회장과 여전도회전국연합회 회장을 지낸 김용재 장로(82세)ㆍ홍기숙 장로(77세).

▲ 주님만을 바라보며 같은 선교비전을 품고 아름다운 동행을 하는 김용재 장로와 홍기숙 장로 부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고 주저함없이 자기를 비우며 희생하고 낮아지려 노력했다. 결혼 50년 동안 먼저 앞서거나 뒤쳐지지 않고 넘치거나 모자람도 없이 언제나 동행하며 나란히 믿음의 길을 걸었다.

김용재 장로는 전북 완주군 시골마을의 기독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거상이었던 증조부 김낙선 옹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았다. 원래 인자한 성품이었던 증조부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양곡을 무상으로 내어주며 빈민 구제에 앞장섰다. 조부 김응규 목사는 전북 일대를 말을 타고 돌아다니며 교회를 세웠다.

이러한 믿음의 터전에서 성실한 학창시절을 보낸 김 장로는 중앙대를 졸업한 후 무일푼으로 사업을 시작해 여러 기업체를 일군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홍기숙 장로는 서울 출생으로 기독교계통의 유치원을 다니며 주님을 알게 됐고, 이화여고와 이화여대를 졸업한 당대 지식인 여성이다. 결혼 후에도 사업을 하며 여성의 사회 진출 환경개선에 노력했다.

▲ 김용재 장로와 홍기숙 장로 가족. 부모의 나눔과 섬김 사역을 보고 자란 슬하 3남은 각자의 생업현장에서 신실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부부는 지인의 소개로 만나 1967년 결혼했다. 남대문교회를 다니다 서울믿음교회을 개척하며 홍 장로가 운영하던 예식장을 예배처소로 활용했다.

김 장로는 서울믿음교회에서 평신도 연합회 활동을 시작했다. 김 장로는 시간과 재정을 들여 선교, 교육, 봉사에 헌신하며 남선교회전국연합회와 전국장로회연합회 회장을 지냈다.

김 장로는 "출석교회 신앙생활도 중요하지만 시야를 넓히고 화합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남선교회 활동을 시작했다"며 "남선교회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다보니 '남성 평신도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 많구나'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김 장로는 남선교회 회장 재임 시절에 대해, "복음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회원들의 소통을 위해 노력한 시기였다"며 "당시 교회와 사회가 모두 반목과 갈등으로 어려웠다. 하나님과의 불통을 먼저 회개하고 회원 간 소통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홍기숙 장로는 계속교육원 활동이 여전도회 헌신의 계기가 됐다. 당시 주선애 박사의 강의를 들으며 여전도회운동의 정체성을 알았다.

홍 장로는 "내가 여전도회 활동에 모든 열정을 쏟을 수 있었던데는 이연옥 명예회장님의 가르침이 많은 영향을 미쳤고, 여전도회 연합활동을 이끌어준 김희원 장로님에게 부지런함과 다양한 실무경험, 섬기는 자세 등을 배워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홍 장로는 여전도회 활동을 하며 쇠약했던 몸이 회복되고 더욱 건강해진 간증이 있다. 여전도회 활동 전에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며, 현재 70대 후반의 나이에도 왕성한 여전도회 활동으로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

홍 장로는 여전도회 활동을 하며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부회장 시절 사학법 재개정을 위한 총회차원의 대처과정에서 삭발을 감행한 것을 꼽았다.

홍 장로는 "삭발을 계기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담대함이 생겼다"며 "앞으로도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일에 나서야 할일 생긴다면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미력하나마 힘을 보탤 것"이라고 강조했다.

부부는 총회의 평신도 양대기관인 남선교회전국연합회와 여전도회전국연합회 회장을 역임한 것을 비롯해 각각 총회 회계와 부회록서기 등 총회임원을 지냈다. 그만큼 역량있는 평신도 리더로 공인받았다.

▲ 김용재 장로와 홍기숙 장로 부부는 전례없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임원을 지냈다. 사진은 김용재 장로가 총회 회계로 활동하던 시절의 총회임원들.

김용재 장로는 현재 남선교회전국연합회 기관지인 평신도신문사 사장과 대명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문서와 학원 선교를 위해 거액의 사재를 기꺼이 출연했다.

김 장로는 "80세가 넘으면 일을 정리하는 시기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은 오로지 순종하며 충성해야 한다는 생각이다"라고 설명했다.

홍 장로는 현재 작은자복지재단 이사장과 한국여전도회찬양단장, 여성복지타운건립추진위원장, 한국여장로연합회장 등으로 활동하며 '선교하는 여성'의 길을 걷고 있다. 이로 인해 개인 시간을 포기하고 많은 재정이 소요되지만 사회와 한국교회에서 여성의 역할 증대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홍 장로는 "여성안수가 법제화될 수 있었던 건 신앙선배들의 노력 덕분이었다"며 "교회 구성원 중 여성이 2/3 정도를 차지하는데 무한한 잠재력을 보고 여성총대 할당 등의 배려와 조치가 총회적으로 필요하다. 한국교회가 준비된 여성에 대한 등용의 문을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 부부는 남모르게 조용히 구제선교를 해왔다. 실제로 부부의 선행이 교계에서 알려진 바가 없다.

최근 선행으로는 지난 2007년 생면부지의 선천성 심장병을 앓던 생후 4개월의 영아를 살리는데 1000만원을 후원했다. 또 2009년에는 축구선수를 꿈꾸던 9살 어린이가 무호흡증으로 힘겹게 생활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술비를 책임졌다.

김용재 장로의 선행이 더욱 귀감이 되는 건 평소 서울 종로5가의 사무실에 나올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주변 허름한 식당의 5천원짜리 백반을 즐긴다는 것. 검소함이 철저하게 몸에 배인 그지만 선교만큼은 아끼지 않고 통이 크다.

이런 남편에 대해 홍기숙 장로는 "남편을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가 본인이 입고 먹는 건 인색하면서도 어려운 이웃을 보면 아낌없이 나눠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홍기숙 장로는 작은자복지재단 이사장을 맡으며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신음하는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사회복지서비스를 지원하며 그들이 꿈을 펼쳐나갈 수 있도록 뒤에서 묵묵히 돕고 있다.

부부의 신앙은 경건과 절제의 삶과 더불어 슬하 3남에게 전승됐다. 3형제는 학원사업, 스튜디오 경영, 항공사 직원 등으로 활동하며 교회봉사에 열심이다.

김용재 장로는 부인 홍기숙 장로를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표현하며, 아들내외와 손주들에게 올바른 신앙전승이 가능했던 건 부인의 배려와 내조 덕분이라고 추켜세웠다.

▲ 영남신학대학교는 작은자 섬김에 헌신한 홍기숙 장로에게 최근 명예사회복지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홍 장로는 "작은자를 섬길 수 있는 긍휼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김 장로는 "잠언 14장에 보면,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홍 장로는 지혜로운 아내이자, 어머니이자, 여전도회 회원이다"라며 "인생을 살다보면 속력보다 방향을 신경써야 한다. 그런면에 있어 아내 홍 장로는 늘 옆에서 방향을 잘 잡아주었다"고 말했다.

김용재 장로ㆍ홍기숙 장로 부부는 앞으로도 건강히 허락하는 한 평신도 선교의 활성화와 작은자들을 돕는 일을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김 장로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 열심히 하면서 남의 일도 돌보면 기쁨이 충만하여진다는 것을 인생 여정에서 배우게 됐다"며 "복음의 말씀이 아니고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홍 장로는 "여전도회는 기도의 어머니 130만명으로 구성돼 있다. 회원 모두가 여전도회 정체성을 확립하고 말씀과 기도의 삶을 살면서 광대한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모든 역량을 발휘하도록 함께 헌신하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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