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장로교, 정체성을 말하다 (1)장로교, 어디서부터 왔는가

[ 특집 ] 교회의 소망, 개혁에서 찾았다

박경수 교수
2016년 08월 09일(화) 16:09

박경수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개혁교회에서 장로교회가 탄생하다


장로교회는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서 탄생했다. 중세 로마가톨릭의 타락과 부패에 항거해 일어난 종교개혁은 단선적이고 획일적인 운동이 아니라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성격을 띤 운동이었다. 루터와 멜란히톤을 중심으로 하는 독일의 루터파, 츠빙글리와 칼뱅을 중심으로 하는 스위스의 개혁파, 스위스형제단으로부터 시작해 남부 독일과 네덜란드로 확산된 아나뱁티스트,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하는 성공회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장로교회는 스위스의 개혁교회 종교개혁 운동에서 비롯됐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장로교회가 처음 등장한 것은 1560년 스코틀랜드였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녹스(John Knox)가 1560년 '스코틀랜드 신앙고백'과 '스코틀랜드 교회치리서'를 제시함으로써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시작됐다. 
장로교회는 교회 정치의 측면에서 보자면 교회 회중들의 대표인 장로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구조를 뜻한다. 

개(個) 교회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는 당회(session)에 의해 치리되며, 노회(presbytery), 대회(synod), 총회(general assembly)의 상위 정치구조를 가진다. 신학적 측면에서 보면 장로교회는 스위스의 개혁교회 특히 제네바의 칼뱅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존 녹스, 장로교의 설립자

존 녹스가 언제 그리고 어떻게 로마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로 회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분명 패트릭 해밀턴(Patrick Hamilton)과 조지 위샤트(George Wishart)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해밀턴은 루터의 영향을 받고 프로테스탄트 성향의 설교를 하다가 이단으로 몰려 1528년 세인트앤드루스(St. Andrews)에서 24살의 나이에 화형을 당했다. 위샤트는 츠빙글리와 칼뱅의 영향을 받고 종교개혁 운동을 펼치다가 1546년 세인트앤드루스에서 33살의 나이에 화형을 당했다. 지금도 세인트앤드루스에 가면 해밀턴과 위샤트의 화형 장소에 그들의 이름 머릿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그들을 기념하는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녹스가 조지 위샤트의 경호원이자 추종자였다는 사실은 초기 프로테스탄트 순교자들이 그에게 미친 영향을 짐작하게 한다.

이후 녹스는 프랑스 갤리선에서 사슬에 묶인채 19개월을 보내기도 했지만 1549년 잉글랜드에 정착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잉글랜드에 '피의 메리'라 불리는 메리 튜더(Mary of Tudor, 재위 1553~1558)가 모진 박해를 시작하자 망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녹스가 피신했던 곳이 바로 칼뱅이 사역하고 있던 스위스 제네바였다. 

녹스는 1556~1559년 동안 '칼뱅 강당'이라 불리는 곳에서 영어권 피난민들을 상대로 목회를 하면서, 칼뱅과 더불어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지도했다. 이처럼 스위스의 개혁교회 운동에서 많은 부분을 공감하고 배운 녹스는 마침내 1559년 5월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로 돌아갔다. 이제 녹스는 에딘버러 자일스(St. Giles)교회에서 강력하게 종교개혁 운동을 펼쳤고, 마침내 1560년 의회가 신앙고백과 교회치리서를 채택함으로써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출발했다. 

이처럼 장로교회는 스위스의 개혁교회와 신학과 정체(政體)를 공유하기 때문에 동일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유럽 대륙에서는 개혁교회로, 영국이나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장로교회로 불린다.


#위그노와 청교도, 개혁교회의 확산

스위스의 제네바를 근거지로 확산되기 시작한 개혁교회 운동은 스코틀랜드뿐만 아니라 프랑스, 잉글랜드, 독일, 네덜란드는 물론이고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등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다. 

그 가운데서 프랑스의 개혁교회 신자들을 위그노(Huguenot)라 부르며, 잉글랜드의 개혁교회 성도들을 청교도(Puritan)라 일컫는다. 위그노라 불린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들은 1559년 파리에서 전국적인 대회를 개최하고 '프랑스 신앙고백'을 채택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장을 확고히 했다. 

그러나 1560년대로 접어들면서 위그노는 발루아왕조 및 로마가톨릭주의자인 기즈(Guise) 가문과 심각한 충돌을 빚게 됐다. 평화를 이루기 위한 회담이 열리기도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결국 1562년 3월 바시(Vassy)에서 예배를 드리던 위그노를 기즈 가문이 집단적으로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부터 프랑스에 종교전쟁이 시작됐는데 이것을 흔히 '위그노전쟁'이라 부른다. 

이후 로마가톨릭과 위그노 사이에 여러 차례 유혈참극이 반복되다가 1598년 4월 13일 '낭트칙령'에 의해 비로소 프랑스의 종교전쟁이 끝이 났다. 그러다가 낭트칙령이 반포된지 100년도 채 지나지 않은 1685년에 루이 14세는 퐁텐블루칙령을 통해 낭트칙령을 취소하고 위그노들에 대해 또다시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다. 

그래서 한편으로 일부 위그노들은 광야에 숨어 살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 나갔다. 소위 '광야교회'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지금도 프랑스 남부에 있는 위그노의 '광야박물관'에 가면 당시 위그노들이 어떤 어려움 속에서 신앙을 지켜냈는지 보여주는 역사의 흔적을 그대로 만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수많은 위그노들은 박해를 피해 유럽과 남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잉글랜드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로마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통일령을 반포해 '중도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그런 미봉책으로는 교회를 제대로 개혁할 수 없다고 판단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더욱 철저한 교회개혁을 요구했다. 

원래 청교도(puritan)라는 이름은 교회 안에서 로마가톨릭적인 잔재를 깨끗이 정화해야(purify)한다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비꼬아서 부른 별명이었다. 그러다가 엘리자베스를 이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공동 왕이 된 제임스1세가 친(親)로마가톨릭 정책을 펼치면서 청교도와 더 심각한 대립을 초래했다. 

결국 잉글랜드 안에서 끝까지 개혁을 추진하던 청교도 세력은 이후 정치적, 종교적 혁명을 일으켰는데 이를 '청교도전쟁'이라 부른다. 이 과정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탄생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에서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판단해 새로운 잉글랜드를 찾아 떠난 사람들도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이다. 필그림 파더스는 스크루비, 레이던, 로테르담, 사우샘프턴, 플리머스를 방랑하다가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자신들이 '뉴잉글랜드'라 부른 미국 동부에 도착했다.


#뉴잉글랜드를 넘어 한반도로

뉴잉글랜드에 도착한 필그림 파더스의 후손들은 미국장로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를 통해 이 땅 한반도에도 복음이 전해졌다. 130여 년 전 미국의 북장로회와 남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호주 장로회의 선교사들이 복음의 씨앗을 들고 한반도에 옴으로써 한국 장로교회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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