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헤르만-개신교 신앙 택한 쾰른 대주교

[ 김인주 목사의 이주의인물 ]

김인주 목사
2016년 08월 09일(화) 15:12

쾰른 대주교로 영화를 누리던 헤르만(1477~1552)이 8월 15일에 고향에서 루터교인으로 숨을 거두었다.

쾰른 대주교 재위기간은 1515년부터 1547년까지 30년이 넘는 세월이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천주교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열렬히 노력하였다.  그러나 천주교 안에서도 갱신운동이 필요함을 깨닫고, 1536년부터 교구개혁을 시도하였다.

16세기 천주교의 뛰어난 신학자였던 요한 그로퍼와 성당참사회가 이를 주도하였다. 1541년 레겐스부르크에서 양측의 신학자들의 협의회가 열리자, 그로퍼는 마틴 부처와 많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1542년 12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부처를 초청하여 본 대성당에서 설교하도록 하였다. 1543년 초에는 성찬개혁을 시도하여 평신도에게 잔을 허용하였다.

그해 중반에는 멜랑히톤과 부처를 불러 개혁적인 교회규율을 입법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사태가 진전되자 그로퍼와 성당참사회는 주교를 더 이상 지지하지 않았고, 황제가 개입하였다.

1547년 초에 후임자가 지명되자 헤르만은 2월 25일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낙향한 대주교는 루터교회의 평신도로서 생을 마치었다. 그의 이름에 붙는 폰 비트는 그의 가문의 이름이 아니고, 고향마을 비트에서 온 것이다.

삼십 년 지난 다음에 쾰른에서는 비슷한 내홍을 다시 겪었다. 방향은 약간 다르지만 대주교의 선택이 교구 전체를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일어났다.

1583에 쾰른의 대주교 게프하르트(1547-1601)가 독신 서약을 깨고, 아그네스와 결혼하였다.

주교는 곧 교체되었다. 하지만 지지하는 신도들도 꽤 있어서 4년간 전쟁이 벌어질 정도였다. 그러나 결국 진압되었고, 쾰른 교구의 모든 개혁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다시 원위치되었다.

<봉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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