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너 있었는가, 그들과 함께 (3)놓아버린 꿈, 잃어버린 청춘

[ 특집 ] 청년의 필요 …'성공'보다 '희망'

장병기 목사
2016년 07월 19일(화) 15:55

장병기 목사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총무

'명문대 나오면 뭐하냐. 백순데.' 한 대학교 졸업식장에서 화제가 되었던 현수막의 문구다. 우리 청년들의 슬픈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이 문구는 입시에 성공해도 취업에 실패해 백수가 될 수 있다는 절망과 자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얼마 전 구의역에서 일어난 사고 역시 힘없이 스러져간 또 다른 청춘의 비극을 여실히 보여준다. 대학에 들어가지 않고 삶의 현장에 뛰어들었던 김 씨는 지하철에서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는 노동자로 열심히 일해 왔지만 살인적인 노동시간과 비정규직의 차별 앞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아야만 했다. 가방에서 발견된 뜯지 못한 컵라면은 그의 삶을 함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학교가 요구한 대로 열심히 공부해 입시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 있던 청년도, 학교 밖에서 시간에 쫓기며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며 땀 흘리던 청년도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노력했지만 노력은 '노오력(努奴力)'일 뿐이라는 딱지를 안고 자본주의의 사생아로 내 몰리고 있다.

청년세대가 형성하고 있는 광범위한 공포와 두려움은 당장의 높은 실업률과 빈곤 때문만이 아니다. 이 빈곤과 불행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을 도저히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학입시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공부했지만 정작 대학을 들어가도 비싼 등록금과 생활비에 허덕이며 '알바인생'을 전전하게 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빚과 함께 대학을 졸업하지만, 대학을 졸업하더라도 일자리를 얻기는 쉽지 않고, 그나마 일자리를 얻더라도 대부분이 비정규직이고 근무환경도 열악하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고학력자에 가장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는 청년들이지만 그렇다고 쉽게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없다. 사회안전망이 턱없이 부족한 대한민국에서 한 번 실패하면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기에 '위험한 도전'은 그야말로 도박이다. 

이런 대한민국 청년의 문제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지금의 청년들은 태어날 때부터 각종 대중매체와 기술이 발달한 사회에서 살아왔다. 손가락만 움직이면 저 멀리 떨어진 화려한 이미지들이 삶의 폐부까지 스미게 된다. 이를 부추기는 소비주의 사회, 신자유주의 사회는 이 거대한 욕망으로 그들을 포장한다. 불을 찾아 헤매는 불나비처럼 욕망을 쫓아다니는 청년들은 결국 욕망하지 않기를 선택한다. 3포세대는 그래서 시작된다. 인간으로서 응당 해야 할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이곳은 급기야 '헬 조선'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까지 낳았다. 지옥으로 변한 이 땅에서 그들을 구할 예수는 과연 어디 있는가?

1. 교회는 '노답'이다? 
지옥으로 변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교회를 싫어한다. 기독학생들조차 점차 교회를 포기하고 있다. 많은 청년학생들은 교회는 희망적이지 않고, '더 이상 답이 없다(노답)'고 생각한다. 가부장적이고 편파적이며, 공의가 없으며 반(反)복음적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교회에서 희망을 찾기는커녕 교회에 안 가는 것이 하나님의 평화를 위해 유익하다고 말할 정도다. 

지금까지 교회는 세상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교회에 구원이 있다고 외쳤지만 늑대소년처럼 아무도 교회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교회 전문가들은 향후 10년 내에 청년들은 5%정도도 유지하기 힘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제 교회는 5%기독청년학생에서 95%가 될 믿지 않는 청년들을 위한 선교로 변해야 한다. 청년들의 요구와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사회 젊은이들을 위해 과감하게 교회를 개방해야 한다. 교회는 왜 청년들이 빠져나가는지 고민해야 한다. 교회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 편에 서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젊은이들의 신앙의 렌즈다. 힘들고 불안한 자신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교회를 갈망한다. 교회가 청년들이 중심이 아닌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하면 할수록 청년들은 멀어진다. 왜냐하면 프로그램의 대부분이 핵심은 '예수 믿으면 잘된다'는 성공신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년들은 이미 구조적 약자고, 성공하지 못한 존재로서 한계를 절감하는 자들이다. 교회는 성공주의에 기반한 신학을 폐기해야 한다. 교회가 먼저 겸손해지고 스스로 낮추어 성육신하는 교회, 십자가 앞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회복 해야만 청년들은 교회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2. 교회는 청년들의 좋은 이웃이 돼야 한다.
청년들은 묻는다. 진정 교회는 사회문제를 포함해 청년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강도 만난 청년들은 그들의 삶에 전혀 선한 이웃이 되어주지 못한 교회를 의심하고 있다. 이제 교회는 다양성을 가지고 청년ㆍ학생들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교회는 젊은이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역량을 강화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조건 없이 나서야 한다. 교회 의사결정 기구에 청년들의 참여를 보장하고 권한을 주어야 한다. 청년을 위한 정책들이 시스템으로 반영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처럼 과감하게 자신을 개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앙이 없으면 안 된다는 편견을 버리고, 감동을 주는 참사람 교회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아울러 생명 정의의 가치로 청년 문제에 대안을 찾는 지역사회, 민간기구, 국제조직과도 협력과 연대를 통해 외연을 넓혀야 한다. 교회는 기억해야 한다. 교회가 아무 조건 없이 강도 만난 이웃을 돕고 치유했던 사마리아인처럼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교회는 잃었던 신뢰와 영향력을 회복하기도 아니면 더욱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청년들은 교회가 소외되고 아픈 이들에게 빛과 소망을 줄 때 좋은 교회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너나 잘하세요'라는 비난의 대상이 될 뿐이다.

3. 구체적으로 도와라.
성남시는 청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 중에 하나로 '청년배당'을 지급하고 있다. 이 일을 위해 관내의 모 교회가 재정을 지원했다고 한다. 교회가 구체적으로 사회와 고민하고 그들에게 다가간 선례이다. 교회는 더 이상 탁상공론식 복음의 나열을 멈추고 스스로 복음이 되어야만 한다. 그 복음이 되기 위해 교회는 노답(?)이라는 청년들에게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선교단체들을 비롯한 전문가들과 사회단체들과 논의를 위한 대책기구를 만들어 접근해야한다. 청년수당, 기본소득 등 다양한 이슈에 관해 교회가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존재 자체가 불안한 이들을 위해 인큐베이팅 지원 역시 절실하다. 교회가 가진 인적 물적 자원으로 청년들을 교육 훈련 시켜줘야 한다. 교회 현장에서 연장과 도구를 주어 구체적인 삶의 질이 바뀌도록 복음의 메시지와 함께 지원해줘야 한다. 교회를 넘어서 지역사회, 교단, 해외 네트워크를 최대한 제공해야 한다. 교회 공간을 청년들의 창업 등 사업을 위한 사무실로 내어주고, 주중 빈 교회 공간을 여름철 지역민을 위한 시원한 문화공간으로 만든다면 교회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청년들을 위한 세상과 소통하는 새로운 시각의 성경공부가 필요하다.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에게 해를 비추고 비를 내리시는 차별이나 판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사랑을 보여주는 열린 성경공부가 필요하다. 그동안 금기되고 터부시 해 온 성 문제, 소수자 문제 등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신학적 안목과 전문적 식견을 제공한다면 교회는 그들로부터 더 성숙해 질 것이다. 아울러 교회는 젊은이들의 신뢰와 섬김을 바탕으로 본질을 회복하고 명예를 되찾게 될 것이다. 이번 홍콩 기독학생들과 함께한 평화프로그램에 참여한 크리스라는 청년 참가자의 말이 귀에서 떠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청년들의 주장이나 요구에 귀 기울이지 않고, 모든 원인을 청년들에게 떠넘기고 청년들만 바꾸라고 요구하는 교회가 문제 아닐까요?"
젊은이들에게 답을 주지 못한다면 더 이상 교회에서 청년들을 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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