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공보 기획> 제주영락교회 임남관 장로

[ 교계 ]

신동하 기자 sdh@pckworld.com
2016년 07월 18일(월) 09:26
▲ 제주영락교회 임남관 장로.

제주노회 제주영락교회 임남관 장로는 주변에 '축복의 통로'가 되고 있다. 임 장로가 속한 모임은 언제나 활력이 넘친다. 익숙한 것에만 얽매이기 보다는 새로운 돌파구를 만드는 업무 추진력이 뛰어나며, 선배를 공경하고 후배를 아껴 모임의 활성화를 이끌어내는 탁월한 달란트가 있다.

임남관 장로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신앙을 가진 후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끊임없이 물으며 최종적 결정권을 드리려 노력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니 가파른 길이 평탄해지고, 끊어진 길이 이어지고, 없던 길도 만들어졌다는 것이 임 장로의 간증이다.

임 장로는 "스스로가 부족한 종인 것을 알기에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하고자 기도하고 있다"며 "인생의 어려운 결정의 순간이나 근심을 덜어낼 필요가 있을 때 하나님께 의지하면 행복해진다. 인간적인 생각만 고집하면 괴로움이 더할 뿐이다"라고 강조했다.

삶의 방향이 하나님께로 맞춰지다보니 긍정적인 에너지가 뿜어져 나와 잠언 4장의 말씀처럼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도 변화시키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다. 그렇게 신앙의 순도를 높이기까지 이기심과 욕심 등의 불순물을 수없이 걷어냈다.

최근 평신도 연합 활동에 주력하는 임 장로는 소속된 제주노회 남선교회연합회가 여러가지 모범적인 사업을 펼치고 평신도지도력을 향상시키는데 일조했다. 선배들의 고견에 귀를 기울이고 동역자들과 서로 존중하며 연대한 결과다.

▲ 임남관 장로의 신앙의 멘토들인 제주영락교회 원로, 은퇴, 시무 장로들.

임남관 장로는 제주도 조천읍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향을 지키고 있다. 임 장로의 집안은 13대째 400년 간 제주도에 터전을 두고 있는 '제주도 토박이'다.

그가 하나님께로 인도된 계기는 드라마틱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 따라 물놀이를 가서 결신했다. 그 물놀이는 조천교회의 여름행사였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체험하며 곧바로 교회학교에 등록했다. 토요일 학생부 모임과 주일예배를 마치면 바로 다음주가 기다려질 정도로 주님에 대한 '첫 사랑'이 뜨거웠다.

임 장로는 3살 무렵 소아마비를 앓아 생사의 갈림길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간증이 있다. 몸이 아파 먼 거리를 걷지 못해 학교 근처에 혼자 살던 외할머니와 함께 지내던 게 어찌보면 결신의 출발점이 됐다. 외할머니 집에서 100m 떨어진 곳에 조천교회가 있었고, 그 교회를 친구의 전도로 다니게 됐기 때문이다.

임 장로는 어려서 글씨를 또박또박 예쁘게 썼다. 글씨체를 눈여겨본 교역자의 권유로 교회 주보를 2년 동안 만들었다. 당시만해도 주보 제작은 기름종이 위에 글씨를 쓰고 잉크를 흘려내려 복사하는 일명 '가리방'이라는 인쇄방법을 사용했기에 임 장로의 손글씨가 큰 역할을 했다.

임 장로는 주보를 만들어 인쇄하고 나면 교회에서 주던 쌀밥 먹는게 즐거웠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쌀밥이 귀하던 시절의 추억담이다. 그러면서도 훗날 돌아보니 주보 만들던 게 믿음이 투철해진 뒷받침이 됐다고 임 장로는 고백한다.

▲ 제주영락교회 담임 심상철 목사 부부와 임남관 장로 부부.

청년이 되면서는 특유의 쾌활함을 바탕으로 제주 기독청년연합회 활동을 했다. 신앙을 가진지 10여 년 만인 28살에 제주도 기독청년연합회 회장을 맡게됐다. 보통 30대 중반에 회장을 맡게 되는데, 임 장로가 뭐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자 회원들이 관례를 깨고 파격적으로 회장에 추대했다.

임 장로는 "기독청년연합회 회장을 하며 리더십 함양도 되고, 여러가지 난관의 돌파구를 만들어가는 법을 차근차근 배워나간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설명했다.

생계유지의 첫 시작은 농사였다. 그러다 지인이 운영하는 서귀포 서점의 일을 도우러 갔다가 마침 처분을 준비하던 그에게서 인수까지 하게 됐다. 1984년의 일이다.

"서점을 열면서 고민이 있었어요. 당시 기독교서점이 제주시에 1곳, 서귀포시에 2곳 있었는데 나름대로 수지타산을 맞춰보니 손실이 있겠더라구요. 그러나 저의 모든 길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다는 생각으로 금식기도하며 지혜를 구했습니다."

서점을 오픈하고 1년 후 제주시로 장소를 옮겨 10평 규모로 새롭게 시작했다. 서점운영 경력이 많지는 않았지만 성실성을 인정받아 서적상조합 총무를 맡으면서 업무상 서울을 오가며 식견을 넓혔다.

드디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찾아왔다. 서울 교보문고에 들러 규모에 감탄사를 연발하던 중 서적 구입 줄보다 문구류 구입 줄이 더 긴 희안한 상황을 목격했다.

그 길로 문구업체인 모닝글로리 본사를 찾아 대리점 개설을 타진했고, 제주도에서는 영업이익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담당자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오픈을 강행했다. 제주도에서는 처음으로 서점과 문구점이 결합된 곳이 임 장로에 의해 생겨났다.

초반부터 히트를 쳤다. 그러나 장사가 잘되니 건물주가 월세를 터무니없이 올리거나 비워달라고 요구했고, 온갖 설움 속에 임 장로는 '내 점포를 갖기 원한다'는 기도를 드렸다. 기도의 열매는 6년 후 맺어져 땅을 매입하고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의 건물을 세우게 됐다.

이후 나날이 성장하는 대리점이 본사로부터 모범케이스로 선정되면서 제주도지역 제품을 독점공급하는 총판이 됐다. 그러나 IMF를 겪으며 본사가 부도나는 상황에서 손해를 감수하며 다른 문구업체로 새롭게 오픈했고, 현재는 선교를 위해 사업규모를 줄이고 기독교서적과 문구 소매만 한다.

▲ 임남관 장로는 최근 평신도 연합 활동에 주력하며 소속된 제주노회 남선교회연합회가 여러가지 모범적인 사업을 펼치고 평신도지도력을 향상시키는데 일조했다. 강원도 홍천에서 열린 남선교회 전국대회에서는 제주연합회가 최다참가상을 받았다.

그는 최근 남선교회 연합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제주노회장을 역임한 홍문수 장로의 발탁으로 남선교회 제주연합회 총무를 맡아 내리 4년을 역임했다. 실무자로서 제주연합회의 남선교회전국연합회 전국대회 참여 규모를 200여 명까지 끌어올리는 일을 했다. 육지도 아닌 섬에서 전국 68개지연합회 중 최다참석 인원을 동역자들과 만들어냈다.

또 임 장로는 제주연합회의 '총회 남선교회주일' 지키기를 활성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남선교회주일 2주 전 임역원들과 함께 노회 4개시찰를 나눠 찾아가 주일지키기와 헌신예배를 요청하고 있다. 그 결과 제주 전체 120교회 중 54교회가 남선교회연합회 활동을 하는데, 그 중 40교회가 남선교회주일을 지킨다.

임 장로는 "인터넷 보급이 활성화되며 누워서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지만 그래도 실제로 보고 듣는 것만큼은 따라올 수 없다"면서 "제주도는 아무래도 섬이니까 육지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참관할수록 좋지 않나 싶어 위치에 구애받지 않고 남선교회 연합 활동을 회원들에게 권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선교회 연합활동에 매진하며 제주도와 육지를 오가며 내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일이 쉽지 않지만, 임 장로는 "하나님께서 선택해서 쓰시면 그 부름에 응답하는 건 당연하다"는 신앙소신을 갖고 있다.

임남관 장로는 교계경력으로 남선교회전국연합회 감사와 부서기를 지내고 현재 부회장으로 있다. 또 현재 제주노회에서 세계선교부 회계, 군경선교위원회 회계, 동북시찰 회계 등을 맡고 있다.

가족관계는 부인 황경자 권사와의 사이에 2남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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