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7월 11~16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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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7월 07일(목) 10:55

월-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본문 : 삼상 15:34~16:13
찬송 : 312장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에게 "선교비결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그는 "하나님의 방법은 전략이나 기술이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자.
 
첫째, 하나님께서 눈여겨보시는 사람이다. "내가 이새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눈여겨보시고 사무엘에게 다윗을 왕으로 기름부으라고 하셨다. 부모 형제 선지자까지 알아보지 못했던 다윗이다.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며, 정직하게, 묵묵히 맡은바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왕으로 보시고, 지도자로 보시고, 리더로 보신다. 비록 사람은 우리를 무시하고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하나님 나라에 필요한 사람으로 쓰신다.
 
둘째, 하나님께 묻는 사람이다. 다윗은 보통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뜻을 이루시겠노라 하셨다. 다윗은 일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다.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를 묻고 행동하였다. 성경에는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라는 말씀이 계속된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한 발자욱도 나갈 수 없었던 다윗이다.
 
셋째,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 사람이다. 다윗의 인간적인 삶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형들이 선지자 앞에 설 때도 혼자 들에서 양을 쳐야했으며 아버지 이새는 다윗의 존재조차도 말하지 않았다. 결혼생활도, 자녀들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마음'이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생명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마음에 주님이 계시면 살고, 주님이 안계시면 산 생명이 아니다. 육신적으로 잘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을 간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윗은 골리앗과 접전을 앞두고 사울에게 자신을 소개한다. "나는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 가운데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여호와께서 사자의 발톱에서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 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하나님을 만난 고백으로 마음이 가득한 다윗처럼 우리 모두의 마음에 주님으로 가득 차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우리 마음에 주님이 가득 차게 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영혜 목사
복지교회

화-또 한번의 개혁을
본문 : 왕하 22:8~14
찬송 : 585장

우리는 개신교이다. 개혁이 없는 기독교는 개신교가 아니다. 본문은 요시야왕이 종교개혁을 단행한 이야기이다. 요시야왕이 즉위한지 18년이 되었을 때 성전을 수리하던 중에 대제사장 힐기야가 성전 안에서 율법책을 발견했다. 선왕(先王)인 므낫세와 아몬이 치리하던 때를 거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잃었고 잊어버렸다. 말씀에 대한 관심도 없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일에 열중했다.
 
그런데 요시야 왕 때에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찾게 되었다. 서기관 사반은 그 율법의 말씀을 요시야 왕 앞에서 읽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한 요시아 왕은 그 옷을 찢고 회개했다.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 왕은 말씀을 따라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우상의 제단들을 다 불태우고 헐어버렸다. 우상에게 경배하던 모든 이방 예배를 다 없애 버렸다. 우상을 섬기던 이방 우상의 제사장들을 다 죽였다.
 
"요시야가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하였다"고 했다. '드라빔을 없앴다'는 말씀이 있다. 드라빔은 가정수호신이다. 사회 구석구석에 있는 우상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남몰래 행하던 모든 우상숭배까지 발본색원한다. 그리고 말한다.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되는 신앙으로 개혁되는 개신교회가 되어야 한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도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 중심의 생각들이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돌아가야 간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하나님께서 그를 칭찬하셨다.
 
종교개혁, 신앙개혁은 우리의 가정에서부터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내가 주인이 되려는 가정은 아직도 드라빔을 품고 있는 것이다. 내 생각, 내 욕심의 드라빔을 불태워 버려야 한다. 말씀으로 돌아가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없이는 개혁을 이룰 수 없다. 지금 우리는 말씀에 비춰 바뀌어야 할 모습은 없는가? 개혁을 이루는 개신교의 성도가 되자.
 
오늘의 기도
 
눈을 열어 말씀이 보여지게 하시고 들려지게 하소서. 그리스도인으로 분별 있는 삶을 살아서 작은 예수로 보여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남성현 목사
봉선교회

수-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본문 : 시 14:4~7
찬송 : 288장

오늘 본문은 무신론의 어리석음을 증언한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가?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죄 때문이다. 죄를 심판하실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매 맞을 것이 두려워 아버지가 안계시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죄를 짓고 그 죄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려고 무신론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것이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가? 결국 우리 안에 있는 죄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죄를 더 이상 즐기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면 자신들의 부패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날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무시하고 때로는 핍박하면서 자신들을 무신론이라는 가면 뒤에 숨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무신론도 있다는 사실이다. 실천적 무신론자는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교회에서 여러 봉사를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내 인생에 중요한 결정의 순간 내가 주인이 되어 내 생각대로 마음대로 결정하면서 살아간다.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실패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무신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증은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다. 때로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것을 빼앗기고 가난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한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구원이 아직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실 구원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즐거워한다. 하나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도 주의 백성들은 여전히 구원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노래한다.
 
구원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예슈아트'이다. 바로 이 단어에서 예수라는 이름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 가운데서 승리하는 능력이다. 고난 속에서 우리가 믿음을 지키면서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포로된 곳에서 돌이켜 주실 것을 바라보며 찬양하자. 하지만 그렇게 살아간다고 해서 그것이 곧 구원은 아니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난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이 되신다. 주님을 위해 살면서 당하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하자. 그때 고난 속에서 나를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이런 삶의 간증이 무신론에 대한 강력한 반증이 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믿음의 증거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본문은 무신론의 어리석음을 증언한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가?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죄 때문이다. 죄를 심판하실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매 맞을 것이 두려워 아버지가 안계시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죄를 짓고 그 죄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려고 무신론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것이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가? 결국 우리 안에 있는 죄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죄를 더 이상 즐기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면 자신들의 부패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날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무시하고 때로는 핍박하면서 자신들을 무신론이라는 가면 뒤에 숨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무신론도 있다는 사실이다. 실천적 무신론자는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교회에서 여러 봉사를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내 인생에 중요한 결정의 순간 내가 주인이 되어 내 생각대로 마음대로 결정하면서 살아간다.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실패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무신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증은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다. 때로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것을 빼앗기고 가난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한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구원이 아직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실 구원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즐거워한다. 하나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도 주의 백성들은 여전히 구원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노래한다.
 구원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예슈아트'이다. 바로 이 단어에서 예수라는 이름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 가운데서 승리하는 능력이다. 고난 속에서 우리가 믿음을 지키면서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포로된 곳에서 돌이켜 주실 것을 바라보며 찬양하자. 하지만 그렇게 살아간다고 해서 그것이 곧 구원은 아니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난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이 되신다. 주님을 위해 살면서 당하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하자. 그때 고난 속에서 나를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이런 삶의 간증이 무신론에 대한 강력한 반증이 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믿음의 증거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문영민 목사
곤지암교회

목-기어서라도 가자!
본문 : 막 7:24~30
찬송 : 70장

 파노라마 같은 삶
 오르막을 갈 때도
 내리막을 갈 때도 있었다
 
 걸어서 가는 것만
 감사인 줄 알았다
 뛰어서 가는 것은
 더 큰 감사인줄 알았다
 
 그러나
 기어서라도
 갈 수 있음이
 더 놀랍고 감사한 
 하늘의 은혜임을 알았다
 
 기어서 가는 것
 자존심 무너지고
 수치라 생각했지만
 기어서라도 갈 수 있는 것
 가장 큰 은혜의 길임을
 주님 바라보며 깨닫게 된다
 
 예수님 가신 십자가 길
 넘어져 찢어 졌고
 걷지 못해 기었다
 구원 이루시기 위해
 사랑 주시기 위해
 
 기어서라도 가자!
 넘어지더라도 가자!
 넘어져, 기어서 가는 길에도
 생명의 꽃 피어나리라.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수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낙심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한다. 심하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기도 한다. 본문의 여인 역시 주님을 만남을 포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의 출신성분이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헬라인, 수로보니게족속, 두로 지역. 그러나 여인은 그 걸림돌을 넘어섰다. 그리고 걸림돌을 넘어서 주님앞에 간절히 나아갔다. 자신을 '개'처럼 여겼던 말 때문에 자존심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 속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예, 주님 유대인이 먼저라고 한다면 저에게도 기회가 올 것을 믿습니다." 여인은 '먼저'라는 말에 집중한 것이다. 그리고 은혜를 기다렸다. 수치스럽고 자존심이 상한다 할지라도,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 여인은 기어서라도 주님 앞에 가겠다는 믿음으로 선 것이다.
 
세상은 우리를 넘어뜨릴 때가 많다. 주저앉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벽을 넘어서도록 기도하며 간구하며 도전하는 것이다. 아래의 시는 얼마 전 삶을 힘들어 하는 성도에게 보낸 시이다. 우리는 뛰어갈 수 없으면 걸어가고, 걸어갈 수 없으면 기어서라도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야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독수리 날개치며 하늘로 오르는 은혜를 허락해 주신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 삶을 통해 열매를 맺어 가신다. 하나님은 그런 위대하신 분인 것이다.
 
오늘의 기도
 
때론 힘들어 기어갈 지라도 포기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함영복 목사
광안교회

금-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걷는 자
본문 : 룻 1:15~22
찬송 : 588장

하나님은 430년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광야에서 여러 가지 명령을 하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 맥추절이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같은 것을 반복하게 되면 그 정신을 잊어버리고 습관처럼 지키게 된다. 왜 맥추절을 지켜야 할까?
 
맥추절이 되면 유대인들은 룻기를 읽는다. 나오미의 가족(남편, 두 아들)은 흉년 때문에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나오미는 남편을 잃고 10년을 살게 된다. 이후 하나님이 고향에 은혜를 베푸셨다는 소식을 듣고 며느리들과 함께 고향으로 향한다. 그때가 보리 추수를 시작할 때였다. 단순히 그 때이기에 룻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룻기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음성이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자신의 며느리들을 불쌍히 여겨 모압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른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남편이 없었다는 것과 혼자서 나이 많은 시어머니를 부양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룻은 보리 이삭 줍는 일을 통해 겨우 연명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일 정도로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 이런 삶을 통해 룻은 보아스와 결혼해 자녀를 낳는데 그의 자손 중에는 다윗이 있다. 후에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이 오르는 여인이 된다.
 
유대인들은 룻기를 통해 오직 하나님을 믿고 미래를 걷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는다. 룻기는 앞으로 나의 삶에 주님이 베푸실 것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맥추절임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 하나님이 맥추절을 지키라고 한 때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3개월 쯤 되어 시내산에 도착하여 율법이 주어질 때 하신 명령이다.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40년이 남았다. 이 말은 절기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일도 우리에게 열어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지킨다는 의미가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믿음의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과거에 얽매여 사는 자가 아니다. 오늘을 향해 사는 자도 아니다. 내일의 일이 불투명하고 고난과 아픔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걷는 자이다. 이것을 믿기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에게 있음을 믿기에 오늘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주님의 날을 기대하며 걷는 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이다. 맥추절을 하나님이 명한 이유이며, 오늘 우리들이 맥추절을 지키는 이유이다.
 주님은 우리의 길을 인도하신다. 믿음의 사람들만이 준비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담대히 걸을 수 있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모든 삶을 믿음의 눈으로 보며 내일을 향해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행복 플러스 원
본문 : 단 1:8~16
찬송 : 301장

철학자 플라톤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은 '조금 부족한 것'이다. 명예, 체력, 경제, 용모, 말솜씨에 있어서 조금 부족한 것이 행복한 것이라고 말한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과 세 친구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불안정한 상황이지만 그들은 시간이 갈수록 행복하게 살아간다. 반면 환관장은 고위직에, 명예도 돈도 있었지만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행복이 더해지는 길은 무엇인가?
 
첫째, 사람의 행복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식하고 그 하나님께 뜻을 정할 때 가능하다. 사람은 스스로 완벽해져서 행복해질 수 없다. 사람이 완벽하려고 하면, 이중인격자가 되든지 죄책감에 빠져서 불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사람은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살고 있다'고 하는 감사가 넘치게 되면서 행복해지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기에 '나는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다. 왕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당당하게 살게 된다. 그 믿음의 역사는 어떤 것도 뛰어넘게 한다. 요즘 사람들은 속도가 중요하기에 삶의 깊이를 잃어버렸다. 마음의 준비, 영적인 세계, 잠시 기도하며 자기를 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삶을 잃었다.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행복해진다.
 
둘째, 사람의 행복은 이웃과의 관계를 통하여 경험하게 하신다. 다니엘은 믿음의 좋은 친구가 세 명이나 있었다. 좋은 믿음의 친구가 있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다. 혼자 보다 함께 만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하도록 격려하고 힘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소유에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의 감정적인 교류에 행복이 있다.
 
셋째, 사람의 행복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따를 때 가능하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채식을 하기로 결정한다. 사람은 먹는 것이 중요하다. 먹거리는 사람의 살과 피를 이루는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먹거리나 모든 생활방식에서 하나님의 창조적 원리를 떠나게 되면, 사람은 건강할 수 없다. 과식하지 말고 절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육식보다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고, 술 담배를 끊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행복은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창조의 원리를 따라야 가능한 것이다.
 
인생을 행복하도록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행복을 더해가는 삶을 살아가자.
 
오늘의 기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세우고, 좋은 이웃과의 관계를 주시며, 창조의 원리를 따르는 생활을 통해 행복이 더해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현선 목사
주향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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