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너 있었는가, 그들과 함께 (2)감히 여자? 보호가 필요한 여성!

[ 특집 ]

홍성호 목사
2016년 07월 05일(화) 14:05

홍성호 목사
순천제일교회

최근 우리 사회를 불안에 떨게 만드는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소위 '묻지마 범죄'로 불리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아무런 상관관계 없이 불특정의 대상을 상대로 행해지는 폭행, 살인 등의 범죄 행위가 그것인데, 대체로 개인의 성격적 결함, 사회적 스트레스,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 등을 원인으로 꼽는다. 인격 장애나 조현병 등 건강치 못한 병적 성격의 소유자가 일상사 가운데 도를 넘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가 결국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어떤 문제에 당면하게 되면 우발적으로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무작위 불특정 다수를 향해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얼마 전 서울 강남역 인근에서 20대 여성이 일면식도 없는 남성에게 이유도 모른 채 살해된 사건은, 은밀한 장소가 아니라 비교적 공개된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는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일각에서는 '묻지마 범죄'의 가해자가 현실불만과 약물중독, 정신질환 등에 노출돼 있었다는 이유로 개인적 범죄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연약한 여성이나 노인, 아동 등을 대상으로 동시다발적인 범죄가 일어나면서 이제는 심각한 사회 문제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그도 그럴 것이 '묻지마 범죄'는 공동생활에 있어 근본이 되는 사람에 대한 믿음, 곧 사회적 신뢰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그 폐해가 말할 수 없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전문가 집단을 중심으로 원인 진단과 해결 방안에 대해 많은 주장과 제언들이 제기됐는데, 대체로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묻지마 범죄'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범죄 유형으로 판단해, 범죄자에 대한 처벌과 동시에 이들을 소위 '위험 집단'으로 격리 또는 관리대상으로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둘째는 '묻지마 범죄'의 사회적 환경의 속성상 누구나 가해자 또는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예방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키며, 개인의 순간적 충동이 범행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사회적 관심과 함께 차제에 사회적 안전망 확충 등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첫번째 관점의 장점은 즉각적인 효과, 곧 공권력이 발동되면서 적어도 겉으로는 사회적으로 심리적 안정감과 함께 일상으로 돌아가게 하는 효과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근본적인 치유책은 되지 못하는 것이 '묻지마 범죄'의 뿌리 갚은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신뢰 또는 사회 통합이라는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두번째 관점도 사회통합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오랜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제도 개선이나 경제적 여건의 변화 등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감안하면 역시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우리는 '묻지마 범죄'와 같은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먼저 용어 그 자체에서 보아야 할 것은 '묻지마 범죄'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묻지 말라고 말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가해자의 개인적인 차원과 사회적 차원 모두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역시 '묻지 마 범죄'의 뿌리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서 나왔다고 생각된다. 

창세로부터 최초의 살인 사건에서도 드러나듯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소외의 문제는 가인이 미지의 세계를 열어가는 과정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 가운데 스스로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 '절제되지 않은 두려움(창 4:7)'으로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이런 '절제되지 않은 두려움'은 그 방향을 찾지 못하고 이내 가장 가까이서 만나게 되는 자신보다 약한 자를 대상으로 삼아 표출되게 마련이다.  

결국 이 두려움은 절망에 이르게 하고, 그 절망은 극단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키에르케고르의 명제에서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마침내 이러한 '두려움은 우리의 생각과 믿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배제시켰을 때만 생기는 것'이라는 바실래아 쉬링크(M.Basilea Schlink)의 언급을 떠올리면서, 오늘 우리를 성경으로 돌아가게 한다. 사실 두려움의 극단은 죽음이고, 그 죽음이 죄의 삯임을 인식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대속의 원리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 아닌가?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벧전 3:7)"

물론 이 말씀은 한 가정의 남편들에게 준 권면이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를 확대된 하나님의 가정으로, '아내'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내 이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지평의 확대와 함께 새로운 사회적 신뢰 내지 사회 통합의 새로운 계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이기적으로 이해한다 해도 적어도 '내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큼은 모든 것이 용납되며 모든 것이 이해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 말씀 그대로, 첫째는 지식,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아버지 하나님이 사랑이요, 둘째는 역시 긍휼히 여김이다. 특히나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언급에서 보듯, 남편들 또는 '묻지마 범죄'의 가해자가 대체적으로 남성들인 것을 감안하면, 그들 역시 가해자이면서도 이 사회의 또 다른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 연약한 그릇일 뿐이다. 이 땅의 여성들은 그에 비해 '더' 연약한 그릇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율법도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서 '더 연약한 그릇'일 수밖에 없는 '고아와 과부와 객'을 돌보라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7~19)" 

'묻지마 범행'의 대상은 누구나 될 수 있고, 이 땅의 '고아와 과부, 그리고 객'일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 곧 내 가족이나 이웃들이 이와 같은 범죄의 피해자일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가해자로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결국 일종의 사회적 병리 현상일 수밖에 없는 '묻지 마 범죄'는 공동체성의 회복, 곧 확대된 하나님의 가정 의식을 회복할 때만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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