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와 순교정신 (4)순교자적 열정 회복하

[ 특집 ]

최상도 교수
2016년 06월 29일(수) 11:47

최상도 교수
호남신학대학교ㆍ역사신학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순교자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의 절정이자 그 공동체가 따라야 할 모델로 제시됐다. '그리스도의 고난에로의 동참을 통한 그리스도 본받음(imitation of Christ)'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이며 본질이었다. 폴리캅의 순교에는 이점이 분명히 나타난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 역시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서신(Letter to the Romans)'에서 순교의 이러한 '본받음'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예수의 죽음을 본받은 순교를 통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 다다를 수 있는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는 것을 '순교자의 법'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정확히 순교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본받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그리스어에서 '본받음'의 개념은 주인의 특별한 행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화이트(R.E.O. White)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도덕적 절대성에 가장 가까운 기독교 원리이며, 그것은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다. 따라서 제자와 본받는 자로서 순교자가 그리스도로부터 본받고자 한 것은 그들이 박해에 직면했을 때 그리스도가 행한 말과 행위들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 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적인 대속 죽음(마20:28, 막10:45, 롬8:32, 고전15:3, 딤전2:6)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리고 갈등 속에 있는 인간들 간의 화해의 성취(고후5:11~21, 엡2:14~16, 고전12:24~26)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예수의 사역은 억압 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해방시키는 것으로 요약된다(눅4:18~19, 사61:1~3). 비록 십자가 사건과 1세기 그리스도 공동체의 해석 사이에 시공간적 간극이 존재하나, 타자를 위한 자기희생과 해방, 용서의 선포, 그리고 화해의 성취는 순교자들이 본받고자 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이러한 해석들이 기독교 공동체가 여전히 로마제국의 박해 가운데 있었던 때에 시작되고 완성됐다는 점이다. 그들은 제국의 폭력적 박해에 대해 지상에서의 복수가 아닌, 타자를 위한 죽음(대속적 죽음), 화해, 그리고 해방의 십자가 영성을 명백히 선포했다. 박해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대중의 증오와 잔혹한 박해를 극복하기 위한 무기는 물리적 폭력을 상징하는 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명백히 보여준 아가페 사랑, 곧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는 자기희생적 사랑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은 곧 영생이라는 초기 기독교 전통에서의 이 삶과 죽음의 역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대한 해석의 핵심이며,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명백히 실현되고 선포됐다(고후4:10~12). 초기 순교자들이란 이러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과 죽음의 역설 가운데,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를 희생해 타자를 구하고 억압된 그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하나님과 인간 간에, 갈등과 투쟁 속의 인간들 간의 화해를 성취하고자 한 자들에 대한 이름이었다. 

그러므로 순교자의 죽음은 단순히 그 자신의 세상 생명의 끝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타자에게 주어 질 새 생명의 초석이 된다. '폴리캅의 순교' 저자는 '복된 폴리캅의 공적 그리스도인 됨의 선포로 초래된 그의 죽음은, 복음을 따르고 예수를 본받아 그 자신의 구원 뿐 아니라 또한 모든 형제자매들의 구원을 열망하는 진실하고 견고한 사랑의 표지'라 설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순교자의 표본적 죽음으로 타자들은 그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또한 이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그의 백성에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는 것(롬5:8)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자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본받은 순교자의 죽음은 박해를 봉인 혹은 종식시키고 어떠한 종류의 억압이든지 그 억압 아래 있는 타자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도구가 된다.

또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순교 기록에 따르면, 순교자들은 '비상한 인내'로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견디며, 폭력 앞에서 폭력으로 저항하거나 저주하며 복수하기보다 의연히 그 죽음을 받아들인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마26:53)를 하나님께 요청하여 자신을 박해하는 자를 물리치기보다 오히려 십자가 죽임을 당하시며 그들을 향해 용서를 선포한 모습을 본받는 모습이다. 
폭력은 언제나 또 다른 폭력을 생산하고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지는 속성이 있다. 그러나 폭력적인 박해에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고 오히려 그 폭력에 의한 죽음을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순교자의 죽음은 바로 이 순환하는 폭력의 연속성을 끊고 화해의 초석을 놓는 행위가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폭력적 죽음 앞에서도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고 그 죽음을 받아들이므로, 순교자들은 폭력을 종식시키고 화해의 직분자가 된다.

초기 콘스탄틴 이전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형성된 타인을 향한 자기희생, 그들의 해방을 위한 죽음, 폭력적인 대적자를 향한 용서의 선포와 그로 인한 화해 성취의 신학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순교자들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순교신학이며 순교영성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교회,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모습을 본받아 내 자신을 이웃을 위해 내 놓아야 한다. 세속화된 이 시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본받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지키는 진리의 파수꾼으로 삶을 이어가야 한다.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진리의 파수꾼은 '죽음에 이르는 증인' 곧 타자의 생존과 인권, 사회적 정의와 평화의 실현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자기희생적 사랑의 실천자이다. 또한 소외되고, 억압당하고 생명이 유린당하는 이웃을 위해 그 어떤 권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생명을 걸고 저항하는 행동이 요구된다. 하나님 왕국의 순교자인 오스카 로메로는 말한다. "나는 지금 엘 살바도르의 부활과 정의를 위해 내 피(생명)를 하나님께 드린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 생명의 희생을 받아 주신다면, 나는 내 피가 자유의 씨앗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무기는 '검'이 아니라 생명까지 내 놓는 '자기희생적 사랑'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금도 무수히 우리 주변에서 발생되는 갈등과 반목, 보복과 폭력의 재생산을 단절시키고, 신실한 화해의 초석을 마련할 수 있다. 

1978년 세계교회협의회 신앙과직제위원회의 인도 방갈로 보고서 '죽음에 이르는 증언(Witness unto Death)'에서 천명한 것과 같이, 진실로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기본, 희망의 원천으로 돌아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본보기로 삼도록 우리를 독려한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기억하며 그리스도를 본받는 순교자적 열정을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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