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와 순교정신 (3)손양원 목사의 순교신앙

[ 특집 ]

이치만 교수
2016년 06월 29일(수) 11:39

이치만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에서 한국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한국교회사의 순교자를 대할 때마다 마냥 왜소해진다. 그분들의 삶과 남긴 글들을 연구하면 할수록 더욱 그렇다. 최근에는 손양원 목사님이 내게 그런 분이었다. 

작년에 손 목사님의 옥중서신을 연구할 기회가 주어졌다. 손 목사님이 옥중에 계시는 동안(1940년 9월 25일~1945년 8월 17일) 주고받은 서신 가운데 현재 남아있는 73편 모두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 서신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손 목사님의 진솔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아버지를 모시지 못하는 불효자로, 아내와 자녀를 보호하지 못하는 못난 아비로, 교우들을 지키지 못하는 약한 목자로, 때로는 애절한 마음을 때로는 소박한 감상을 지닌 인간 손양원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손양원 목사님이 직접 쓴 서신은 모두 33편이었다.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리고 다양한 상황의 수신자에게 보낸 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한결같이 일관된 것이 있었다. 

첫째로 그것은 굳건한 믿음을 담고 있었다. 자신이 겪는 육체적인 고통, 가족과 교우들의 곤궁한 삶에 대한 비통한 심경을 토로하면서도 주 예수를 향한 믿음은 결코 흔들림이 없었다. 1943년 5월 17일은 손 목사님이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가 예정된 날이었다. 그러나 손 목사님이 끝까지 전향(轉向), 즉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일제는 석방을 취소하고 심지어 무기구금형을 내렸다. 

이에 손 목사님은 판결에 대해 항고했다. 그러자 재판부는 '기독교교리에 기초해 반국가적 사상을 고집한다'고 하며 항고를 기각했다. 항고가 기각된 직후 아버지 손종일 장로에게 띄우는 서신에서 손 목사님은 다음의 한시(漢詩)를 지어 보냈다. 손 목사님의 믿음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시였다.

'본가를 멀리 떠나 옥중에 들어오니/ 깊은 밤 깊은 옥에 깊은 시름도 가득하고/ 밤도 깊고 옥도 깊고 사람의 시름도 깊으나/ 주와 더불어 동거하니 항상 기쁨이 충만하도다/ 옥중 고생 4년도 많고 많은 날이나/ 주와 더불어 즐거워하니 하루와 같구나/ 지난 4년 평안히 지켜주신 주님 / 내일도 확신하네 여전한 주님'

그 다음으로 일관되는 것은 역시 사랑이었다. 익히 알다시피 손 목사님은 자식을 죽인 원수도 사랑한 분이 아니었던가. 그 사랑의 마음은 옥중서신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애양원 교우이자 믿음의 여동생 양선에게 보낸 서신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약소한 돈이긴 하지만 너희에게 십 원을 보낸다. 수남, 주심, 무연, 점순이 동생들과 요긴하게 써주기 바란다.(중략) 미안한 마음 조금도 가지지 말고 기쁘게 써주기를 바란다. 새해에 생선 한 마리라도 먹기를…' 여기서 '동생들'은 원래 애양원의 교우들이었다. 그 가운데 수남은 16세 때 한센병이 발현하여 부모로부터도 버림받았던 것을 손 목사가 애양원으로 데리고 들어온 동생이었다. 

이 서신을 보낼 즈음 손 목사님은 열악한 옥중생활에 영양이 극도로 부족해 시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만주에 있던 둘째 동생 문준이 면회와 별식으로 영양보충을 하라고 영치금을 넣어줬다. 그런데 그 돈을 북방리 동생들에게 송금한 것이다. 당시 한센병 환자들이 보호시설을 벗어나서 생활하기가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손 목사님이 동생들의 궁핍한 삶을 염려해 송금한 것이리라. 특히 말미에 새해에 생선 한 마리라도 먹기를 바라는 그 마음을 대할 때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버지, 어머니, 형제 그리고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지극하고 절절한 사랑은 물론이거니와, 애양원 교우들에 대한 섬세한 사랑의 마음 또한 서신 곳곳에 묻어났다. 

그리고 필자가 가장 인상 깊게 느꼈던 것은 손 목사님의 의로움이었다. "너희가 죄를 대적하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히 12:4)"라는 성경구절로 아들 동인 군에게 교훈을 전하는 서신이 있다. 이 서신에서 손 목사님은 '옳지 못한 것(죄)을 부끄러워하고 옳지 못한 것(죄)에 피 흘리기까지 싸워 이겨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필자가 그의 의로움을 느낀 것은 서신에서 '의'를 변증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삶이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삶이었기 때문이었다. 손 목사님은 믿음이 옳다고 말하는 삶을 그대로 살아냈고 또한 옳다고 믿으니까 그대로 살아냈다. 

또한 손 목사님의 의로움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않는 마음이었다. 해방이 되자 손 목사님은 8월 17일 출옥했다. 옥중에 갇혔던 성도들도 출옥했다. 이른바 '출옥 성도들'이다. 그런데 해방은 됐지만 돌아갈 한국교회가 없었다. 

한국교회는 잠시나마 역사에서 그 이름이 사라졌고 '일본기독교'라는 명패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한국교회는 교회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신사참배 여부로 교회분열의 기로에 서게 됐다. 이 때 재건파의 최덕지 전도사가 손 목사님에게 "세속화된 교회에 소속되지 말고 거기에서 설교도 하지 말고 한국교회를 바로 잡아나가자"고 권유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손 목사님은 "주님도 나 같은 죄인이 사는 이 땅 위에 오셨는데 내 어찌 세상을 버리며,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신 주님이신데 내 어찌 현실 교회를 마귀당이라 하여 절연하겠습니까!"라고 말하셨다. 한편으로 이런 말씀도 하셨다. "지금은 신사참배 여부를 운운하기보다도 진정한 회개가 필요할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입니다(안용준, 사랑의 원자탄- 성광문화사 2011)" 이쪽이나 저쪽의 진영논리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참회를 해야한다는 말씀이리라. 

이런 묵상을 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상황을 맞이했던 독일교회의 슈투트가르트 선언(1945)이 떠올랐다.  

첫째, 우리는 보다 더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지 못한데 대한 죄를 회개한다.
둘째, 우리는 좀 더 진실하게 기도하지 못한 죄를 회개한다.
셋째, 우리는 좀 더 감사와 기쁨에 넘친 생활을 하지 못한 것을 회개한다.
넷째, 우리는 좀 더 열렬히 사랑하고 용서하지 못한 죄를 회개한다.

이 선언은 히틀러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참회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히틀러에 저항하여 숱한 고난을 겪었던 사람들이 고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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