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와 순교정신 (2)주기철 목사의 순교신앙

[ 특집 ]

이상규 교수
2016년 06월 29일(수) 11:30

이상규 교수
고신대학교ㆍ역사신학

1897년 출생한 주기철 목사는 1925년 목사가 된 후 20여 년 간 목회자로 살다가 1944년 4월 21일 밤 47세의 나이로 순교자의 길을 갔다. 그는 무엇 때문에 그리고 무엇을 위해 목숨을 마다하지 않았을까? 그에게도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고, 귀여운 자식들이 있었고, 공경해야 할 노모가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륜지정에 매이지 않고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 그에게도 목회지가 있었고 말씀에 목말라하는 성도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호소를 뒤로하고 죽음의 길로 들어섰다. 그에게도 안거위락(安居爲樂)의 세욕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잠시 걸치고 있던 의복처럼 훌훌 벗어 던지고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유는 단 한 가지. 그에게는 죽음보다 소중한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진리였고, 하나님 나라였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전한 신뢰였다. 그에게 있어서 "주의 인애가 생명보다 나으므로(시63:3)" 자기 생명을 기꺼이 내놓았다. 목숨마저도 버려야 할 보다 소중한 가치,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 순교신앙이자 순교정신이었다. 이런 확신이 있었기에 그는 세상의 것에 연연하지 않고 순교자의 길을 간 것이다. 

순교(殉敎)란 신앙을 위한 죽음으로 정의되지만, 일반적으로 3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때 순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신앙고백에 근거한 불가피한 죽음이어야 한다.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자기가 믿는 신앙 때문에 불가피하게 받아드리는 죽음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그 죽음이 복음 증거와 직접적으로 관련돼야 한다. 복음증거와 무관한 일상의 죽음은 순교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셋째는 기독교 복음에 대한 적대적인 개인이나 집단에 의한 죽음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단순한 해상조난 사고나 교통사고와 같은 사고사는 순직(殉職)일 수는 있으나 순교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주기철 목사는 자신이 믿는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이 신앙고백적 증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적대적인 국가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므로 그는 진정한 의미의 순교자였다. 그렇다면 그가 죽음을 불사하고 지켰던 순교신앙이란 무엇일까? 

우선 그는 독립운동 혹은 민족운동을 위해 순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경남 진해 인근 웅천군에서 출생한 주기철 목사는 인척 주기효가 설립한 개통학교에서 김창환, 유수성, 이규설 등을 통해 민족애와 반일사상을 접했고, 향리에서 만세운동에도 참여한 바 있다. 민족운동가인 조만식이 설립한 오산학교에서는 이승훈 조만식으로부터 민족을 배웠다. 그도 그 시대의 아들이다. 따라서 그도 민족, 민족의 독립, 혹은 민족운동에 무심하지 않았고, 그에게도 조국의 현실을 헤아려 보는 안목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민족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감옥에 가고 민족적 가치를 위해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그가 목숨 바쳐 지키고자 했던 가치는 민족주의적 가치가 아니었다. 그는 조선의 민족주의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제국주의가 지향했던 민족주의도 거부했다. 일제의 민족주의는 신도(神道)에 기초하고 있고, 이 민족주의 팽창이 정한론(征韓論), 곧 조선 침략론(朝鮮侵略論)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의 실현을 위해 식민지민에게까지 강요했던 것이 신사참배였다. 따라서 신사참배 거부는 민족주의에 대한 거부였다. 주기철 목사의 저항이 결과적으로 독립운동이나 민족운동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한번 죽기로 각오(一死覺悟)한 것은 민족의 독립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는 사랑의 보편주의를 추구했고,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을 신뢰했다. 주기철 목사를 '독립운동가 주기철'로 이름하는 것은 그가 살아갔던 삶의 의미를 왜곡하거나 곡해하는 것이다. 

둘째,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되 이를 '운동(運動)'의 차원에서 조직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의 신사참배 거부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이었고 그의 싸움은 오직 믿음만의 싸움이었다. 그는 개인적인 확신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했지만 이를 조직화하거나 운동으로 이끌어가지는 않았다. 물론 그가 신사참배가 문제시 된 1938년 2월 이후 4차례 구속돼 있었으므로(1차: 1938년 2~6월, 2차:1938년 8월~1939년 2월, 3차: 1939년 9월~1940년 4월, 4차: 1940년 8월~1944년 4월) 신사참배 거부를 운동의 차원으로 집단화하거나 조직화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실제로 그는 이런 대응을 지지하거나 시도한 흔적이 없다. 그는 신앙의 싸움은 개인적 확신에 근거해야지 조직화된 힘으로 대항해서는 안 된다고 인식했다. 

이 점은 이북의 이기선 목사나 이남의 한상동 목사와 다른 점이었다. 이기선 목사나 한상동 목사는 조직화된 국가 권력에 대해서는 조직화된 힘으로 대결해야 한다고 보아 반대운동을 조직화하고 이 힘으로 대항했으나, 주기철 목사는 비록 달걀로 바위치기라 할지라도 개인적 확신으로 싸워야 한다고 인식했다. 대구지방의 김명집 목사가 주기철 목사와 더불어 연합된 힘으로 투쟁하고자 했을 때 주 목사는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피하라고 권했다. 신사참배 거부자들만의 노회 구성을 청했을 때 주기철 목사는 시기상조라는 이름으로 이를 거부했다. 주기철 목사는 믿음의 싸움에서 가치 체계의 집단화는 일견 조직의 강점을 살릴 수 있으나 가치의 상실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헤아리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이념을 운동화할 경우 시간이 경과하면서 이념이나 정신은 사라지고 조직의 힘으로 유지될 수 있다는 점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강하게 반대했지만 반대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권하거나 설교하지는 않았다. 그는 조직의 강점을 이용하기 덕을 보기보다는 조직의 약점인 신앙 정신의 상실을 우려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번 죽기로 각오한 주기철 목사의 신앙 정신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분명한 자기 결단이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외로운 단독자였다. 그는 다른 어떤 힘을 의지하지 않았다. 다른 어떤 것에 자기 양심을 짐지우지 않았다. 그는 그가 살아갔던 그 시대의 불신앙, 우상숭배, 세속적 가치에 저항했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에 말씀의 빛을 따라 충실하게 응답하야겠다는 것이 그의 신앙정신이다. 바로 이점이 그의 순교정신이었고,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 정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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