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6월 27일~7월 2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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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6월 22일(수) 14:05

월-위기를 기회로 바꾼 욥

본문 : 욥 42:12~17
찬송 : 545장

모든 성경은 구속사다. 욥기서는 위기를 기회로 바꾼 욥의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통한 구원의 완성과 위기를 기회로 바꾼 성도 승리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가 도대체 무슨 힘이 있어 그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는가?
 
첫째, 주신 이도 여호와, 거두신 분도 여호와 신앙이다. 그런 고난과 위기 상황 속에서 욥의 행동을 보자.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 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 이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지금 어떤 고난 속에 있는가? 더 이상 죄악 속으로 빠지지 말고 지금 일어나서 철저히 회개하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인정하고 신앙으로 고백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라. 그리하면 위기는 기회로 바뀔 것이다.
 
둘째, 시작은 미약하나 끝이 창대하게 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면 우선, '하나님을 찾으라'(암 5:4,6) 그리하면 산다. 두 번째는,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기도하라.'(렘 33:3 마 7:9~13) 세 번째는, '청결하고 정직하라.' 하나님이 돌아보신다. 하나님이 돌아보시면 된다. 그리하면 '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이 창대하리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십자가 보혈의 능력이며 부활의 능력이다.
 
셋째,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순금'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용광로의 연단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 앞에 설 자가 누구인가?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 지어다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2-14) 이것이 바로 십자가 보혈의 은총 부활의 승리 다시 오실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지금 나에게 찾아온 위기는 분명 기회다.
 
오늘의 기도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는 믿음으로 이 한 주간도 승리하게 하옵소서. 아멘.


안정순 목사
순천엘림교회

화-전도의 대가를 지불합시다
본문 : 요 12:23~26
찬송 : 502장

에밀 부르너는 "불이 타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교회는 선교하기 위하여 존재 한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 말씀은 세상 가운데 파송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생명을 살리기 위해 그리고 이방 세계로 생명사역이 확장되기 위하여 복음의 대가가 필수적으로 따름을 말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면, 생명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의 증인된 삶을 위하여 우리가 지불해야 될 대가가 무엇일까?
 
먼저는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고난과 희생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육체의 모든 고통과 정신적인 모든 모욕을 다 참고 감당하셨다. 사도바울도 동족과 이방인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의 대가를 기꺼이 감내했다. 즉 그는 복음을 위하여 수고, 옥에 갇힘, 매 맞음, 여행의 위험, 거짓 형제의 고소,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음을 당했다(고후 11:23~27).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위하여 흘리는 뜨거운 중보적 기도의 눈물과 인내의 대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양보하고 배려하고 희생하는 십자가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와 익숙한 문화와 세계와 이별하는 사회적인 순교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주님께서도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의 영광과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죄인의 자리까지 낮아지셨다. 바울도 자기의 모든 자유와 특권을 포기했다. 고린도전서 9장 19~22절에 의하면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라"고 했다.
 
전라남도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유진 벨은 당대 뿐 아니라, 그의 사위 윌리엄 린튼이 3대를 이어가며 조선 사람보다 더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했다. 윌리엄 린튼의 아들 휴 린튼은 '순천의 검은 고무신'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그들의 겉은 조선인들이 부르는 '서양귀신' 모습이었지만, 속은 철저히 조선인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쳤다. 이들의 발자취는 순천기독교역사박물관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우리 또한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주님의 성육신의 정신과 방법으로 다가가기에 힘써야 한다.
 
오늘의 기도
 
오늘도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위하여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또 다른 많은 생명을 살리는 복된 한날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현찬 목사
울산양정교회

수-실패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본문 : 롬 8:28~39
찬송 : 292장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은 우리에게 2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 우리는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며, 둘째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개인과 역사 속에서 이것을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우리가 계획한 하루보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하루가 더 낫고, 우리가 계획한 인생보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생이 더 나은 이유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가운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을 보기 원한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모습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형벌은 자기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가장 큰 은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때로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고 가슴으로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삶의 순간들을 맞을 때가 있다. 그때 두려워하거나 위축되지 말고 바울처럼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우리를 고발하리요",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라고 담대히 맞서야 한다. 특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려는 셀 수 없는 영적인 도전들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선포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바울의 인생을 붙들었던 한 가지 확신이 있다. 그것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는 확신이다.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유족들에게 "죽음조차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다"는 이 말씀이 큰 위로가 되는 것을 자주 목도한다. 우리의 삶의 모습은 각각 다를지라도 인생의 결론, 신앙의 결론은 동일하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이 확신이 있다면 감당치 못할 고난이나 극복하지 못할 문제가 그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반드시 넉넉히 이기게 하신다. 이것을 확신하기에 우리는 오늘도 그 부르심을 따라 믿음으로 살아간다. 
 
오늘의 기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음을 확신하며 승리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전창근 목사
문호교회

목-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
본문 : 수 6:15~21
찬송 : 357장

오늘 말씀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의 첫 성인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함락시킨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안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승리의 역사가 있다. 당시 여리고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성벽의 높이가 무려 20m나 되고, 외벽과 내벽으로 되어있는 견고한 성이었다. 그에 비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광야에서 양을 치던 유목민들이었다. 아무리 봐도 여리고성을 함락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우리 인생길에도 내 앞을 가로막는 여리고성이 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문제들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여리고성을 뚫고 나갈 수 있을까?
 
첫 번째,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려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려운 방법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저 하루 한 바퀴씩 6일 동안 여리고성을 돌라고 하셨다. 그리고 7일째에는 하루 동안 일곱 바퀴를 돈 후,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고, 백성들은 크게 소리를 지르라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칼 한번 쓰지 않고 여리고성을 점령하게 된 것이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였다. 그런데 이 승리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가정에 승리를 주시는 이야기이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삶의 여리고성, 내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난공불락과 같은 삶의 문제들도 무너뜨려 주시겠다는 것이다. 능히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여리고성이 아무리 커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두 번째, 여리고성 앞에서 큰소리를 쳤다. 왜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침묵하게 하셨을까?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여리고성을 돌며 침묵하게 하신 것은, 부정적인 말이나, 불평의 말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일주일간 돈다는 것은 충분히 불평이 나올만한 상황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고 계셨다. 그래서 그들을 위하여 이렇게 침묵하며 성을 돌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다시 7일째 되는 날 크게 외치라고 하셨다. 이 때의 소리는 승리의 함성이고, 하나님께서 성을 무너뜨려주실 것을 확신하는 믿음의 외침이었다.
 
지금 당장은 내 앞을 가로막는 인생의 장애물들, 여리고성이 너무도 심각하고, 나의 삶의 송두리째 흔드는 것 같지만 우리가 조금만 시선을 돌려서 하늘을 바라보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줄 믿는다. 아무리 견고한 여리고성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도리어 적들이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다.
 
오늘 하루도 부정적인 말은 침묵하고, 믿음의 말, 믿음의 함성으로 나아갈 때,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여리고성은 다 무너질 줄 믿는다.
 
오늘의 기도
 
오늘 하루도 내 앞 길을 가로막는 어떤 여리고성도 하나님께서 다 무너뜨려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보준 목사
옥포중앙교회

금-하나님을 기억하는 오늘
본문 : 삼하 11:1~27
찬송 : 425장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이 시험만 끝나고' '이 프로젝트만 끝나고'. '~만 끝내고'라는 말 뒤에 숨어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늘 갈망한다. '~만 끝나서' 우리 입에서 '이제야 살겠네'라는 탄성이 나오는 때를 살아가길 말이다.
 
다윗은 우리가 그렇게 바라보며 사는 '이제야 살겠다'라는 목표에 다다랐던 사람이다. 성경은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다는 말로 그의 인생이 전 인격적으로 회복되며 승승장구함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다윗은 '이제야 살겠네'라고 탄성이 나오는 그 자리에서 넘어졌다.
 
본문에서 그를 넘어뜨린 중요한 단어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보내다(솰라흐)'이다. 이 단어는 11장에 12회나 사용된다. 이 단어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자리에서 사용하는 단어이다. 다윗의 보내는 행동은 처음에는 공적인 것이었다. 1절에서 다윗은 전쟁을 위하여 요압과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점차 다윗의 보내는 행동은 불법적이고 개인적인 행동으로 바뀌어갔다. 3절에서 다윗은 한 여인의 신상을 알아보기 위해 사람을 보냈고, 4절에서 그녀를 데리고 오게 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그는 자신이 원하면 다 할 수 있는 수단으로 '보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데 자신감을 보인 다윗은 보낼 수 있는 자리에 올라서서 넘어졌다. 그는 이 자리에서 행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 분별하지 못한 채 자신의 명령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는 밧세바를 자신에게 종속시켜 버렸다. 임신소식이 들리자 죄를 은폐하고자 우리아에게 사람을 보내고, 우리아를 전장에 죽일 편지를 보낸다. 그의 보내는 행위는 계속된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다윗의 보내는 명령으로 마무리 된다. 그러나 성경은 '보내다'라는 말을 통해 징계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낸다.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대로 '보내기'를 일삼던 그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셨다. 이로써 사람들의 삶에 대해 '하나님 노릇'을 했던 다윗의 탈선은 끝이 난다. 나단 선지자는 자신의 마음대로 살고 있던 다윗의 앞에 서슬퍼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이제야 살겠다'하는 상황이 과연 어떤 삶인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는, 나의 권한이 많아지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는게 아닌가? 하나님께 부탁드리지 않고도 살아지는 그러한 삶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그 상황은 미래에 어떤 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아 자유함을 누리는, 하나님께 받은 복을 세어보는 오늘이다.
 
오늘의 기도
 
오늘이 하나님께서 주신 살만한 날임을 알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성경 목사
연지교회

토-꼴찌의 하나님
본문 : 눅 15:11~32
찬송 : 480장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누구나 국가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훈련하고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한다. 그런데 일등을 하지 못한 선수들은 짐을 싸서 죄인된 심정으로 조용히 일찍 귀국한다. 반면, 일등을 한 선수들은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관광하며 쉬다가 귀국한다. 그들이 귀국할 때 공항에는 취재진들과 환영인파로 붐비고 카퍼레이드를 펼치기도 한다. 다같이 국가를 대표해서 훈련하고 경기에 임했는데도 일등만 기억하고 꼴찌는 죄인을 만드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꼴찌의 하나님'이시다. 본문이 그것을 보여준다. 둘째 아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방탕한 생활로 탕진하고 거지꼴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큰 잔치를 베풀며 기뻐했다. 이것을 본 형이 아버지에게 "나는 성실하게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잔치 한번 없었는데, 어떻게 동생에게는 이럴 수 있느냐?"며 항의하고 집을 나가버렸다. 분명 맏아들은 일등이고, 둘째인 탕자는 꼴찌다. 사람들은 맏아들 같은 일등을 좋아하겠지만, 하나님은 탕자와 같은 꼴찌를 좋아하신다. 왜 그럴까?
 
꼴찌들은 감사와 감격이 있다. 탕자의 아버지가 두 아들을 위해 잔치를 연다고 생각해 보라. 형은 당연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겠지만 탕자는 방탕한 불효자식인 자기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면서 감사하며 감격할 것이다. 바리새인과 세리도 동일하게 의인으로 인정받았다면 어떨까? 바리새인은 당연시하고 감사가 없겠지만, 세리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감사하고 감격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꼴찌를 좋아하고 복 주신다.
 
그런데 진짜 일등은 누구이고, 꼴찌는 누구일까? 세상에서 평가하는 일등과 꼴찌는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 일등이라고 하는 사람이 일등이다. 일등과 꼴찌의 기준은 천국이다. 천국 가는 사람이 일등이고, 지옥 가는 사람이 꼴찌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각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을지라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면 꼴찌 인생이다. 불신자들과 달리 예수님을 믿고 천국 가는 성도들은 '만나 보자 만나보자 저기 뵈는 저 천국 문에서, 만나 보자 만나 보자 그날 아침 그 문에서 만나자'고 노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천국 가는 성도들이 일등이고, 지옥 가는 사람들이 꼴찌이다. 우리는 세상에서는 꼴찌가 되더라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에 가는 일등이 되어야 한다.
 
오늘의 기도
 
꼴찌라고 낙심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 천국 가는 일등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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