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을 바라보는 시선

[ 기고 ]

손은식 목사
2016년 06월 21일(화) 16:36

거리 위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지난 2014년 1월 1일부터 거리사역을 시작했다. 이 글은 거리 사역을 하며 보고 느낀 점을 기독공보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 적었다.

서울역은 노숙인들에게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이다. 서울시에서 위탁을 맡겨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다시서기 노숙인 센터와 진료소와 채움터(식당)와 쉼터와 고시원과 민간시설이 모여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방에서 상경한 노숙인들이 처음으로 발을 딛고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다.

평소 5백여명 이상의 노숙인이 서울역 주변에 흩어져서 지낸다. 그들은 각자 거리로 나온 배경이 모두 다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다른 것처럼. 단편적으로 말하면 서울대 법대를 나온 분부터 초등학교 졸업인 분까지, 대기업에 다닌 분부터 선주와 중견사업체 사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른 이력과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서울역에 함께 모여 지내기에 서로가 불편하고 힘든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노숙을 하게되는 원인은 한 사람을 세워주는 지지기반의 약화와 붕괴로 인함인데, 우선 낮은 소득으로 인한 퇴거와 주거박탈, 실직이나 사업실패로 인한 가족해체, 교육과 인적자본의 취약성, 정신건강이나 알코올중독의 문제,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온 가족폭력과 학대와 가출 그리고 개인적인 삶의 선택 등 무척 다양하다.

그런데 행정 기관 및 대부분 사람들은 노숙인을 뭉뚱그려 사회 실패자, 부적응자, 혹은 거지로 판단해버린다. 그래서 그들의 자활을 돕는 방법도 관계적인 접근을 통한 지지기반의 회복이 아니라 분리나 격리를 통해 시설에 입소시킨뒤 집단 교육을 통한 갱생의 방법을 택하고, 종교단체에는 단체 급식과 예배의 방법으로 개인의 삶의 이야기를 철저히 무시하고 외면한다.

그리하여 서울역에는 수 많은 노숙인을 돕는 기관과 시설과 종교단체가 있지만, 노숙인의 지지기반의 붕괴로 인한 끊어져버린 개인과 가족과 공동체의 관계 회복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단체나 개인은 전무하다. 하나님의 사랑의 실천은 손과 발에서 열매 맺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전달에서 결실하는 것인데 말이다.

서울역은 우리나라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장소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탄생과 성장과 위때를 고스란히 받아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울역을 지키는 노숙인의 많은 수는 대한민국의 위기의 때인 1997년도와 2008년도 금융, 외환위기 후로 사업과 가정이 해체되어 사회구조적으로 거리로 떠밀려 나왔다. 무려 10년에서 17년 째 거리를 떠돌고 있다.

우리는 노숙인의 문제를 사회구조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국가경제의 위기가 없었다면, 사회복지가 잘 되어 있었다면 아마도 그들은 지금 한 가정 속에서 생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리에서 생활하는 오랜기간 여러차례 자활을 시도해보았고 결국 실패하게 되었는데 그 때 그분들을 사회부적응자나 실패자나 걸인이 아닌 한 가정의 소중한 일원으로 보았다면 여전히 거리를 전전할까 생각해본다.

현 정부의 노숙인 자활 시스템도 노숙인의 자립생활체험이나 개인의 자율성을 키우는 프로그램으로 변해야 하고 그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노숙인 개인의 인격존중과 헌법 10조의 기본권을 지켜주는 것이다. 결국 노숙인의 탈노숙을 위해서 앞서 언급한 여러 지지기반 및 개인 자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삶에 대한 목적과 희망을 가지게끔 사회적 인식 변화와 제도적 개선이 뒤따라야 한다.

 

경동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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