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토마스 크랜머

[ 김인주 목사의 이주의인물 ]

김인주 목사
2016년 06월 21일(화) 16:29

토마스 크랜머(1489-1556)는 7월 2일 태어났다. 그의 시대는 종교개혁 첫 세대였다. 영국 왕실의 신앙노선 변경에 따라 영욕의 세월을 살게 되었다.

헨리8세의 이혼 문제에 연루되면서 그는 국왕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유럽대사의 직책이 주어졌고, 독일의 제후들과의 연계를 위해 노력하게 된다. 뉘른베르크에서 그는 오지안더와 교유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오지안더의 조카딸 마르그리트과 결혼하였는데, 이 관계는 15년 이상 드러내지 못했다. 국왕의 혼인에 관한 논쟁은 자신의 일이 되어버렸다.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이후에 그는 국왕의 이혼과 새로운 결혼을 옹호하며 국정에 협조하였다. 계속되는 헨리8세의 이혼과 결혼을 그는 꾸준히 지지하며 뒷받침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기도서를 집필하여 영국교회의 예배의식의 틀을 마련하는 기틀을 세웠다.

새로운 국왕으로 등극한 에드워드6세(1537-1553)는 고전과 신학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영민한 소년이었지만 국사는 섭정들이 좌우하였다. 성년이 되기 전에 사망하였는데 결핵이었다. 오래 살았다면 영국의 교회개혁은 훨씬 더 빠르고 튼튼하게 진전되었을 것이다.

헨리8세의 맏딸 메리는 영국역사 최초의 여왕이었다. 권좌에 오르자 바로 영국을 천주교 신앙으로 회귀시키려 하였다. 5년 동안 처형된 신교도는 300명에 달한다. 그 중에 크랜머가 있었다. 동료들이 화형당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절망과 공포로 말미암아 그는 여섯 번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서 그는 의연하게 철회한 것을 부정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였다. 화형장에서 잘못을 저지른 오른 손을 화염에 집어넣고 다 태워지기까지 버티는 그의 결의는 강한 인상을 준다.

<봉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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