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공보 기획> 에덴상사 대표 최원기 장로

[ 교계 ]

신동하 기자 sdh@pckworld.com
2016년 06월 20일(월) 16:21
▲ 부천중앙교회 최원기 장로.

조실부모, 20대 초반에 사업 시작 후 10년 만에 완전 실패, 지하 사글세 생활, 버려진 채소를 주워 파는 리어카 행상, 죽도록 싫어하던 교회를 30대 초반부터 다니기 시작, 부인과 호떡 장사, 고물 수집, 그리고 비철 전문 매입사 대표로 재기에 성공, 40대 중반에 장로 장립...

최원기 장로(서울서남노회 부천중앙교회)의 간증이다. 가족사를 비롯해 여러가지 시행착오 등 평범하지 않은 사건들이 그의 삶을 휘감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내며 결국 인생역전을 일궈냈다.

최 장로는 강원도 양구에서 6대 독자로 태어났다. 식구들이 아들을 얻기 위해 100일 불공을 할 정도로 철저하게 불교를 믿는 집안이었다.

어머니가 돌 지나 병사(病死)하고, 아버지마저 3살 때 소천했다. 누나 2명은 결혼으로 분가한 상황에서 친할머니의 손에서 컸다. 할머니가 가진 전답이 있어 소작을 주고 받은 임대료로 생활해 가정형편은 비교적 넉넉했다.

최 장로는 "할머니의 손자 사랑은 지극하셨다. 또래 아이들이 갖지 못한 책가방을 사주시고, 왠만한 사람은 꿈도 못꿀 치아교정을 해주셨다"며 "늘 좋은 것을 나에게 주셨다. 그러고 틈틈히 절에 데리고 다니시곤 했다"고 할머니를 기억했다.

70대 촌로의 할머니는 공부에 대해 압박을 주지 않았다. 다만 '남의 것은 절대로 탐하지 말 것', '부지런하고 정직하게 살 것'을 귀에 못이 박이게 강조했다. 이 가르침은 두고두고 삶의 자양분이 됐다.

손자를 애지중지 아끼던 할머니마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별세했다. 당시 받은 충격을 최 장로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러면서 큰누나 집으로 거처를 옮겨 18살까지 함께 살았다.

▲ 최원기 장로와 할머니.

18살에 혈혈단신 서울로 입성했다. 조그만 오퍼상(무역회사)에 들어가 4년 근무하고 어릴적부터 꿈인 개인사업을 22살부터 강원도 춘천에서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 때 당돌하게도 '어른이 되면 내 사업을 시작하고, 빨리 결혼해 가정을 가져야 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빠가 되면 가훈을 '근면, 성실, 정직'으로 정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는 문구점과 철공소를 경영했다. 집안에서 물려받은 재산이 있어 사업 시작에 구애받지 않았지만 10년 뒤 '쫄딱' 망해 무일푼이 됐다.

그는 춘천을 떠나 가족을 이끌고 연고도 없는 서울 천호동의 보증금 없는 월세 6만원짜리 방을 얻어 생활했다. 가락시장에서 상품가치가 없어 내던져진 채소를 주워 필요한 곳에 판매할 요량이었다.

눅눅하고 캄캄한 지하 월세방에서의 생활은 비참했다. 게다가 리어카를 빌려 채소를 얻어 파는 일이라는게 수입이 거의 없어 가족부양에 대한 부담감이 그를 짓눌렀다. 그렇게 1년의 세월을 보내고 제발로 교회를 찾았다.

최 장로는 "어려서부터 기독교인이라면 그냥 싫었다. 그런데 시장에서 한창 힘든 나날을 보낼 때 누군가가 '교회 가면 복 받는다'고 말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를 갔다"며 "잠실에 있는 조그만 교회였는데, 설교를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고 회상했다.

말씀에 깊은 감명을 받은 후 당장 '토큰' 살 돈도 없으면서 1000원을 감사헌금했다. 하나님만이 피난처라는 사실을 인지한 사건이었다.

가락동에서 리어카를 2년 정도 끌다 1990년 1월, 지인의 제안으로 부천으로 이사했다. 마찬가지로 '사글세 인생'이었다.

부천에서는 노점상을 하면서 과일이며 옷을 팔았다. 노점을 할 때는 고정수입이 없어 입에 풀칠만하는 정도였다. 사글세 방은 지대가 낮은데 있어 비만 오면 침수가 됐다.

그래도 부인 이금자 권사는 짜증 한번 안냈다. 이 권사는 종이컵을 만드는 공장에서 밤샘 일을 하는 등 가정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냈다.

▲ 비철을 전문으로 매입하는 최원기 장로의 사업장 전경. 누가 보던 안보던 정직하게 일을 하니, 어느새 복이 그에게 찾아왔다.

최 장로는 부천중앙교회에 등록하고 세례를 받았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술과 담배는 끊지 못했다. 신앙이 아직 무르익지 않은 그에게 힘든 삶을 달래주는 친구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신앙의 전환기가 찾아온다. 교회 부흥회에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했다. 부흥회에서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는 느낌이 들더니 환한 빛이 자신을 비추는 것을 보았다.

최 장로는 "부흥회 이후 그렇게 좋아하던 술과 담배를 일순간에 끊었다"며 "자나깨나 교회 가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신앙이 점점 뜨거워졌다"고 말했다.

그 시기에 최 장로는 중고 1톤트럭으로 온 동네를 누비며 고물을 수거해 파는 일을 했다. 길거리에서 호떡을 팔던 부인 이 권사가 푼돈을 모으고 모아 남편에게 중고트럭을 선물해줬다.

할머니 유훈대로 성실하게 일했다. 당시 일부 고물 수집상들은 건축현장을 찾으면 새 자재를 보고 고물이 아닌줄 알면서 몰래 주워가곤 했지만, 최 장로는 신앙인의 양심에 따라 합법적으로 허락을 맡고 폐자재만 수거했다.

남을 속이지 않고 일한 자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일산 신도시의 한 건축현장의 간부가 트럭을 몰고 지나가던 최 장로를 부르더니 "양심적으로 일하시는 걸 계속 지켜봐왔다"면서, 철수하는 현장의 폐자재 일체를 최 장로에게 무상으로 넘겼다. 그리고 또 다른 건축현장를 소개해 폐자재를 가져가게 했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 제 인생에 벌어진 순간이었죠. 가게 하나 없이 고물을 수집하는 사람이 당시 돈으로 1년에 억대를 벌었으니 말이죠."

그러면서 신앙의 멘토인 부천중앙교회 담임 김영범 목사의 조언으로 강서구 쪽에 50평 가게를 얻어 본격적으로 고물사업을 시작했다. 동네 고물상 개념이 아닌 동이나 알루미늄 등 비철을 받아와 다시 가공해 판매하는 '에덴 상사'를 설립했다.

6개월 만에 인근 300평 부지를 더 얻은 후 십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비철계통의 자재값 폭락으로 업계가 수없이 무너지지만 최 장로의 사업장은 운영이 잘 되는 편에 속한다.

▲ 최원기 장로는 서울서남노회 남선교회연합회 회장으로 회원들과 함께 해외선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사진은 남선교회연합회장 취임식에서 최원기 장로 가족.

그는 하나님께 거저 받은 사랑을 나누고 싶어 개인적으로 군선교지와 농촌교회를 계속 도와오고 있다. 최 장로는 체력이 있을 때 선교와 교회 봉사에 매진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최 장로가 출석하는 부천중앙교회 담임 김영범 목사는 최원기 장로에 대해,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고 있다"며 "교회 어떤 일이든 헌신적으로 순종하고 봉사하는 장로님"이라고 소개했다.

최 장로는 현재 서울서남노회 남선교회연합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임기 중 회원들을 독려해 해외선교센터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연합회 1년 예산과 맞먹는 비용이 들어가지만 3년 계획을 갖고 회원들과 기도하고 있다.

최 장로는 "능히 할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기도하고 준비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 장로는 앞으로의 선교비전에 대해 "부천중앙교회 시무장로로 있으면서 우리 교회가 추진한 필리핀 교회 건축, 단양 교회 건축, 2012년 새성전 건축 등에 참여하며 하나님 전을 세우는 일에 행복감을 맛보았다"며 "개인적으로 시골교회의 건축을 지원하고 싶은 생각에 기도 중이다. 내가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를 생각하면 게으른 종으로 살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한편 최원기 장로는 부인 이금자 권사와의 사이에 1녀 1남을 두고 있다. 아들은 고등부 수련회를 통해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대학 졸업후 신대원에 진학해 현재 안산제일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다. 딸은 학교 교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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