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프리드리히 대왕

[ 김인주 목사의 이주의인물 ]

김인주 목사
2016년 06월 16일(목) 10:21

프리드리히 대왕(1712-1786)은 즉위하자마자 종교적인 관용의 정책을 폈고 칙령을 반포하였다. 1740년 6월 22일에 일어난 일이다. 그의 아버지는 야전사령관으로 행세하였다.

두 아들이 유아기에 사망했으니, 셋째 프리드리히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그만큼 훈육은 가혹했고, 아들은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젊은이로 자라났다. 이제 즉위했으니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신교와 구교의 관용 정도가 아니라, 유대교 이슬람까지도 괜찮다고 생각했으니 매우 앞서 가는 계몽군주였다.

그의 스승은 볼테르였다. 독일의 대왕이 철학자를 초청하였다는 소식에 그가 총리직을 곧 맡으리라는 관측도 있었다. 교감선생님 앞에 호출받은 학생처럼, 두 사람이 그려진 그림도 있다. 대왕은 문예를 숭상하였고, 학자와 예술가들을 후원하였다. 괴테보다도 더 많은 저작을 남겼고, 모차르트보다도 더 많은 곡을 작곡하였다. 대부분 태작이었다.

그는 포츠담의 상수시 궁전을 지었다. 근심이 없다는 뜻이다. 궁정에서 예술가들과 어울리느라 왕비와는 별로 지낼 시간이 없었다. 미모와 지혜, 경건 등 모든 덕목을 갖춘 배우자였지만 평생 열 번도 만나지 못하였을 거라는 뒷말이 있다. 후사는 없었고 조카가 대를 이어야 했다.

세자 시절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를 반박하는 저술을 익명으로 출판하였다. 볼테르의 감수를 거치고 네델란드에서 발행하였다. 관용과 평화의 꿈은 실현되었을까? 부왕과 마찬가지로 그도 평생 전장에서 많은 세월을 보내었다.

"왕은 나라의 첫째 머슴"이라는 그의 명언은 우리 정계에서도 선거 때면 흔히 인용되곤 한다. 부유하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서 나의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이 올무가 되어서, 그도 평생 전쟁을 많이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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