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6월 20~25일

[ 가정예배 ]

이경남 기자 knlee@pckworld.com
2016년 06월 16일(목) 10:12

월-인도하시는 하나님
본문 : 출 13:20~22
찬송 : 390장

오늘 본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격적으로 광야길에 들어서게 되는 장면이다. 당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정만 60만명이었고, 여자와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을 다 포함하면 200만명이 넘는 대집단이었다. 여기에 애굽에서 함께 노예 생활하던 다른 족속들도 함께 따라나섰다. 그리고 가축들도 많았다. 그런데 광야라는 곳은 본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살 수 없는 곳이다. 낮에는 무척 덥고, 밤에는 영하의 추위이다. 어떻게 200만명이 넘는 백성들이 무사히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을까?
 
첫 번째,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의 앞길에서 인도해 가신다. 2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라고 했다. 광야를 만드신 분도, 광야 구석구석을 잘 아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런 하나님께서 먼저 앞서 가시며 그들은 인도하신다. 우리의 인생길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에 많은 인도자가 있지만 하나님보다 더 세상의 길, 우리의 형편, 우리의 삶을 잘 아시는 분은 없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가셔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신다. 우리를 막고 있는 놋문을 부숴버리시고, 쇠빗장을 꺾어 버리시고, 닫혀 있는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주시는 줄 믿는다.
 
두 번째,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항상 인도하신다. 하나님이 내 인생길의 인도자가 되신다는 것도 감사하고 귀한데, 하나님께서 떠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끝까지 책임지고, 변함없이 인도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길을 가면서 3일에 한 번꼴로 불평을 쏟아 놓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불평을 다 받아주시면서 끝까지 인도하셔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셨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햇볕을 차단해서 그늘을 만들어 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통해 추위를 물리치시고 인도해 주셨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인도하실 때 구체적으로 인도하신다.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며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위로와 평안과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또한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우리를 보호하시는 표시이다. 광야라는 곳은 극한의 기후이다.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는 지역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광야에서 40년을 산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안전장치였다. 마치 광야에서 냉난방장치가 가동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살인적인 더위에서 무서운 추위에서 보호해 주신 것이다. 또한 광야에는 많은 이방 족속들이 살고 있었다. 그런 자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다. 그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적들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가이드가 되시고, 우리 인생의 보호자가 되실 때, 우리 인생을 최종 목적지인 가나안땅과 소원의 항구에 무사히 도착하게 될 줄 믿는다.
 
오늘의 기도
 
오늘도 광야같은 세상길을 가는 저희를 인도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보준 목사
옥포중앙교회

화-고난을 넘어 영광을 바라보라
본문 : 롬 8:18~27
찬송 : 482장

'고난과 영광'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광야를 지나야 가나안이 있듯, 십자가를 지나야 부활이 있고, 고난을 지나야 영광이 있다. 고난과 영광의 관계에 대해 사도 바울이 가진 분명한 확신이 있다. "생각하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생각하건데'라는 말의 언어적 의미는 '계산해 보건데'라는 의미가 있다. 사도바울은 현재의 고난을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계산하여 비교한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의 고민은 '현재 당면하고 있는 고난'이다. 우리가 현재의 고난에 삼킨바 되지 않으려면 장차 나타날 영광 속에서 현재의 고난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의 안목이다. 바울에게는 고난이 결코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그에 걸맞은 영광으로 되돌아 온다는 믿음의 안목이 있었다.
 
이런 믿음의 안목이 있었기에 바울은 목록을 적을만큼(고후 11:23-27)이나 주와 복음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끝까지 참고 견딜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남과 비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 직면하고 있는 고난'과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비교할 줄 아는 믿음의 안목이다. 이런 믿음의 안목이 있어야 현재의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다. 참고 견디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것은 끝까지 참고 견디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로인해 예수님은 승리하셨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중에 있었던 욥이 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저 참고 견딘 욥은 마침내 승리했다. 그래서 현재의 고난을 이기고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솔로몬의 지혜가 아니라 욥의 인내이다.
 
끝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이 곁에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자.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정죄하지 않는다. 성령은 우리의 체질을 아신다. 그래서 깊이 이해하고 도우신다. 무엇보다 우리의 연약한 기도생활을 도우신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해 주신다. 그 성령의 중보 안에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그 성령의 중보로 인해 우리는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영광을 누리게 된다.
 
오늘의 기도
 
현재의 고난에 굴복하지 않게 하시고 참고 견딤으로 주의 영광을 보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창근 목사
문호교회

수-멀찍이 따라가는 사람들
본문 : 마 26:57~58
찬송 : 324장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가까이 따를 수도 있고, 멀찍이 따를 수도 있다. 그런데 멀찍이 따르면 예수님을 놓칠 수가 있고, 예수님의 삶을 제대로 배울 수도 없다. 또한 멀찍이 따라가면 마귀가 끼어들고, 세속적인 욕망이 개입되어 참된 신앙인의 길을 갈 수 없다. 이것은 본문에 등장하는 베드로가 잘 보여주고 있다. 체포되신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시는 광경을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면서 보고 있다. 멀찍이 따라가는 베드로에게 두려움의 마귀가 침투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까닭은 멀찍이 따랐기 때문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구원이 확신이 없으면 멀찍이 따라간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전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과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비로써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교인들 가운데서도 '정말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천국은 정말 있을까? 성경말씀은 진짜일까?'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은 멀찍이 따라간다.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유일하신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분의 뒤를 바짝 따라가야 한다.
 
또한, 세상 것을 다 버리지 못하면 멀찍이 따라간다. 베드로는 과거의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멀찍이 따라갔다. 여차하면 옛날의 직업인 어부로 돌아가려는 의도이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한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다. 예수를 따르는 길이 항상 풍요롭고 세상적인 복을 받는 길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자 '나는 아버지 장사를 지내고 따르겠다. 나는 가족과 작별하고 오겠다'라는 핑계로 예수님을 떠났다. 세상의 미련 때문에 따르지 못하는 사람의 비유이다.
 
그리고 두려움이 있을 때, 멀찍이 따라간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가까이 갔다가 혹시라도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거나 아는 척 하면 잡혀서 죽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예수님께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는 성도들이 있다. 가까이 갔다가 생계도 집안일도 다 버리고 오직 예수와 교회만 보고 살게 될까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과 교회와의 거리를 적당히 두고 신앙생활 한다. 예수님의 뒤를 가까이서 바짝 따라가는 것이 복 있는 삶이다.
 
오늘의 기도
 
예수님의 뒤를 바짝 따름으로 복 받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권오선 목사
예안교회

목-두 가지 시(視) 기도, 다시 기도
본문 : 느 1:1~9
찬송 : 369장

"믿음이란 한마디로 기도다." 마틴 루터의 말이다. 믿음이 있는지가 기도로 드러난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는 느헤미야의 모습을 통해 기도를 시작하게 하고, 기도를 지속하게 하는 두 가지 시(視)를 발견하고 기도를 시작하는 용기를 얻고자 한다.
 
기도가 시작되는 첫 번째 시(視), 그것은 시야(視野)이다. 즉, 시야(視野)안에 품는 것으로 우리의 기도가 시작된다는 말이다. 지금 느헤미야는 고향인 이스라엘에서 거의 700마일이상 떨어진 외국 땅 바사 즉, 페르시아에 와 있다. 이런 그에게 들려온 소식은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았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졌다는 말이었다.
 
허물어진 예루살렘 성과 환난과 능욕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느헤미야의 시야(視野) 안에 들어왔다. 굳이 자신이 그 일에 책임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있었는데 그의 모든 관심은 예루살렘의 형편에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지점은 우리의 기도가 포기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국에서 당하는 일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였을 때, 그는 그들의 아픔과 절망까지도 함께 떠안게 되었다.
 
그 때 느헤미야는 어떻게 했는가? 4절 말씀은 그가 금식하며 기도하는 자리에 섰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두 번째 시(視)가 발동된다. 시야(視野) 안에 펼쳐진 아픔들을 직면할 때, 기도의 시작과 멈춤의 기점에서 두 번째 시(視)가 발동되는데 그것은 바로 시각(視覺)이 열리는 일이다. 느헤미야의 시각이 열려 발견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지금 기도하고 있는 대상이 누군가에 대한 인식이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며,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그리고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느헤미야는 인식하게 되었다. 상황을 보면 기도가 멈춰버릴 것 같은데 하나님께 대한 시각이 열리자 그 자리에서 다시 기도가 시작되었다. 또한 느헤미야는 시각(視覺)이 열려 이 문제의 원인을 깨달았다. 이 당시 유다 귀환민들의 어려움은 '시대적 상황에 따른 어려움'이라 보여지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그는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였다'고 고백한다. 유다 귀환민들이 겪는 이런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잊으셨기 때문이 아니며 하나님이 무능해서도 아님을 분명히 한 그는 과거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비롯해 현재 포로 귀환민들의 죄와 불순종이 빚어낸 결과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에 대한 시각이 열리자 그 자리에서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오늘의 기도
 
지금의 답답한 상황, 시야 안에 들어온 이들의 안타까운 상황들을 품어내고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 앞에 의뢰하는 기도를 시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성경 목사
연지교회

금-위기를 기회로 바꾼 다윗
본문 : 삼하 22:1~7
찬송 : 419장

다윗은 메시아 계보의 중심을 이루는 통일왕국시대 2대왕으로 40년을 통치했던 왕이다. 그가 통치했던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안했고 나라는 부강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그가 걸어온 길은 거칠고 험한 가시밭길 비탈진 고난의 길이었다. 그에게 뼈를 깎는 아픔들로 인해 침상을 적시는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 고난을 오직 믿음으로 이기고 승리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왕이 된 것이다.
 
첫째, "그가 위에서 손을 내미사 나를 붙드심이여…" 바로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다윗이 고난의 때 믿고 의지했던 여호와는 나의 반석, 요새, 건지시는 자, 피할 바위, 방패, 구원의 뿔, 높은 망대, 피난처, 구원자, 폭력에서 구원하신 분이시다. 그는 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나를' '내가'라고 선언함으로 자기의 하나님으로 믿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위에서 손을 내미사 나를 붙드신다. 그러므로 어떤 고난도 시험도 이기는 것이다. 그는 폭풍우처럼 밀려오는 그 고난을 이길 힘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 "그가 위에서 손을 내미사 나를 붙드심이여…" 이 하나님을 믿고 손을 내미는 자 하나님이 붙드셔서 걸어가야 할 상황에서는 걷게 하고 뛰어야 할 상황에서는 달려가게 하며 날아야 할 상황에서는 독수리처럼 날게 하신다.
 
둘째, "내가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위기의 때에 자신을 지키는 믿음이다. 그는 고난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치 않고 하나님 떠나지 않고 모든 법도를 내 앞에 두고 그의 규례를 버리지 아니하고 그의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했다. 그는 계속 '내가' '내가' '내가' 지켰다고 고백한다. 그는 위기로부터 믿음을 지키고 자신을 지킨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라고 선언한다. 위기가 나에게 찾아 왔을 때 가장 무서운 적은 밖에 있는 것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것이며 그것은 오직 예수님 십자가, 보혈의 능력 밖에 없다.


셋째 감사와 찬양의 믿음이다. 욥도 다윗도 고난의 때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하나님이 어떤 소리를 들으시는가? 불평 원망이 아닌 감사와 찬양의 소리를 들으신다. 고난의 때 감사와 찬양은 승리의 개가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나를 십자가 보혈과 부활의 능력으로 구원하시고 다시 오실 예수로 말미암아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린다. 이것이 바로 어떤 고난도 은혜로 바꾼 우리의 믿음이고 승리이다.
 
오늘의 기도
 
믿음으로 위기의 성벽을 뛰어 넘게 하시고 감사와 찬양으로 이 한 주간도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안정순 목사
순천엘림교회

토-주님께서 영광을 나타내시다
본문 : 요 2:1~11
찬송 : 438장

본문의 가나의 혼인집 잔치에서 주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을 때 2가지 변화가 나온다. 하나는 질적인 변화로, 물이 변화여 포도주가 되는 역사다. 이것은 가치관과 사람의 목적이 변하는 것, 이론적인 믿음에서 체험적인 믿음으로 바뀌는 것이다(11). 둘째는 양적인 변화로 혼인집 잔치가 모자람과 부족함에서 풍성함으로 바뀌는 역사다. 그러면 어떤 때에 주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셔서 변화의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가?
 
먼저 예수님을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 분의 권위 아래에 있을 때이다. 본문의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 예수님께서 손님으로 계실 때에라도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면, 하물며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영접할 때이겠는가? 디모데전서 3장 15절에 교회인 우리들이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도의 위치가 진리이신 주님을 아래에서 떠받드는 기둥과 터라는 것이다. 그런데 때로 주님께서 왕좌에 계시지 않고 문밖에 서계실 때가 있다(계 3:20). 그 순간은 주님께서 토하여 낼 정도로 첫사랑이 미지근한 신앙으로 변질되고(계 3:15~16). 자신이 영적인 가난뱅이인데도 불구하고 교만하여 주님의 은혜를 거부할 때이다(계 3:17). 그러므로 우리는 미지근한 신앙과 교만한 신앙을 매 순간마다 십자가에 못 박으므로 주님이 내 안에 주인으로 거하게 해야 한다(갈 5:24, 2:20).
 
다음으로 응답의 확신을 갖고 주님께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주님께 즉각적으로, 구체적으로, 응답을 확신하고 간구하는 것이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나이다(3)". "무슨 말씀을 하시는 대로 그대로 하라(5)."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함이니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3~14)"고 하셨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이름 없는 하인들처럼 물을 아귀까지 채우는 순종을 해야 한다. 즉 따지지 않는 순종을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기도하라 했으면, 온몸을 불태울 정도로 아귀까지 채우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충성하라고 하셨다면 아귀까지 채우는 충성을 해야 한다. 일사각오의 태도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자.
 
오늘의 기도
 
주님, 내 인생의 주인으로 좌정하시고, 우리의 간절한 기도와 순종에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채워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현찬 목사
울산양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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