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6월 13~18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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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6월 08일(수) 09:50

월-아름다운 걸음
본문 : 창 13:1~18
찬송 : 430장

아브람은 창세기 12장에서 흉년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가는 결정을 했다. 이 결정은 아브람에게 고통을 안겨주게 된다. 흉년이라는 어려움을 혼자서 해결하고자 인간적인 속임수를 동원한 이 일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개입하셨고, 사라를 보존하셨다. 아브람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심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아가 자신이 얻게된 모든 소유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런 아브람은 13장에서 놀라운 걸음을 걷고 있다.
 
첫 번째 걸음은 신앙을 재정비하는 것이었다. 그는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가나안 사람들이 거주하던 벧엘과 아이를 피하고 그 사이에 장막을 쳤다. 이는 12장의 실수, 즉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사람의 도움으로 피해 보려한 어리석음을 멈추기를 선택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 거짓과 속임수를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아내, 소유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며 서 있었다. 분명 소유의 부유함 가운데 있었으나 그는 부족함 투성이인 자신을 보며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격하며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두 번째 걸음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인정하며 일상에서 관대함을 보이는 것이었다. 롯의 목자와 아브람의 목자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자 아브람은 롯에게 우선권을 주었다. 롯에게 우선권을 준다는 것은 차후에 생기는 어떤 일에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관대함의 내용은 14~17절에 이어진다. 롯의 이야기가 기록된 10~11절과 아브람의 이야기의 14~17절은 기가 막힌 대조를 보여준다.
 
10절의 '눈을 들어' 이것은 롯이 주어인 평서문이다. 반면 14절 '눈을 들어' 이것은 하나님이 주체가 된 명령문이다. 11절 '바라본즉'은 롯이 주어인 평서문이다. 반면 14절 '바라보라' 역시 하나님이 주체가 된 명령문, 권유문이다. 자기의 눈을 들어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대로 선택한 롯과 아브람에게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준비한 온 땅을 바라보게 하시는 하나님이 기막힌 대조로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돌보심의 행위에 참여하고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 주신 선물. 그것은 다시 돌보심으로 대해주는 것이었다.
 
세 번째 걸음은 다시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심을 믿고, 하나님의 돌보심의 행위에 적극적으로 행동해 다시 제단을 쌓는 것. 이것이 아브람이 보인 아름다운 걸음의 내용이었다. 신앙을 재정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돌보심을 고백하고, 우리 일상에서 그 하나님의 돌보심의 행위에 관대함으로 참여하고, 다시 하나님의 돌보심에 감사로 단을 쌓는 이러한 아름다운 선순환의 걸음을 걷는 하루가 되길 기대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돌보심의 행위에 오늘도 관대함으로 참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성경 목사
연지교회

화-네 눈물을 보았노라
본문 : 사 38:1~8
찬송 : 272장

선교사들이 처음 선교지에 부임하면 언어의 장벽이 제일 큰 어려움인데, 그럴 때는 그냥 붙잡고 울면서 한국말로 기도한다고 한다. 현지인들은 선교사들의 눈물이 그 사람의 머리와 손에 떨어지면 '이 사람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구나'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본문에도 눈물의 아름다움과 능력을 소개하고 있다. 유다 왕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뜻대로 선정을 했고, 구약시대의 종교개혁도 단행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사야로부터 '곧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히스기야는 낯을 벽으로 향하고 통곡하며 기도했다.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 눈물은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아름다움과 감동이 있다.
 
그런데 어떤 성도들이 눈물을 흘릴까? 간절함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 눈물을 흘린다. 전도를 많이 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눈물을 많이 흘렸다'는 것으로 요약된다고 한다. 죽어가는 영혼이 불쌍해서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해서 전도의 열매를 맺은 것이다. 구약의 요엘 시대에도 죽어가는 영혼이 많아지자,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낭실과 단 사이에서 울면서 기도했다. 예루살렘 성이 허물어지고 백성들이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는다는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도 수일 동안 울면서 금식하며 기도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시면서 살려주셨다. 나사로의 삼남매는 부모가 없고, 나이도 모두 결혼적령기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그런 삼남매를 불쌍히 보신 것이다.
 
그러면 눈물이 주는 축복은 무엇일까? 본문 5절을 보면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 오년을 더하고"라고 한다.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를 보신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시키셨다. 간절함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 눈물의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그때 하나님은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고 하시면서 기도에 응답하신다. 독일의 작가 괴테는 "눈물과 함께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힘이 무엇인 줄 모른다"고 했다. 눈물로 간절하게 기도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능력의 위대함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 보기를 원하신다. 그 눈물은 간절함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 흘리는 축복이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성도들이 되자.
 
오늘의 기도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권오선 목사
예안교회

수-장애물을 극복하고 전진하자
본문 : 막 2:1~12
찬송 : 347장

오늘 본문은 중풍병자 한 사람을 돕기 위하여 4명의 친구들이, 장애물을 뚫고서 주님 앞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수많은 장애물과 싸워 그 친구를 주님께로 인도하여 생명의 구원과 육신의 치료를 받게 하였다. 일단 그들 앞에 봉착한 장애물들은, 일차적으로 집안에 사람들이 꽉 차서 예수님께로 접근할 수 없었다. 그리고 4명의 친구들은 서로 리더가 되고자 하는 독불장군의 교만, 자기 일과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이기주의, 주님이 과연 메시야일까 의심하는 불신앙, 남의 집을 뚫게 되었을 때 겪는 사람들의 불평과 비난의 소리라는 장애물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그 모든 장애물을 잘 극복을 하고 주님께로 나아갈 수가 있었을까? 먼저는 합심하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들은 병든 친구를 돕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하나가 되었다. 하나님의 일은 합심을 해야 능력이 나타나고, 또 효과적인 결과도 나타난다. 느헤미야가 성벽재건을 위하여 일할 부분을 분담하여 합심하여 일했을 때 그들은 단 52일만에 성벽을 재건하게 되었다. 기러기는 혼자 날면 8000km를 날지만, 연합하여 함께 날면 4만km를 난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당국의 핍박 속에서도 합심하여 기도했을 때 그들은 성령충만하여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극심한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물건을 통용하고 뜨거운 사랑을 나눔으로 고난을 넉넉히 이겨내는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가 있었다.
 
또 한 가지는 사랑의 수고와 희생이 있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4명의 친구들은 병든 친구를 위해 모든 수고와 희생을 각오했기에 장애물을 극복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임받을 수 있었다. 일단 그들은 몸으로 수고했고, 남의 집의 천정을 뚫으므로 경제적인 비용을 각오했고, 사람들의 비난의 말도 감수했다. 교부인 터툴리안은 "교회는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다"고 말했다. 즉 교회는 누군가의 눈물과 희생과 피를 통해 세워진다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교회가 영적인 부흥과 성장을 이룬 것은 그 옛날 조선을 사랑하여 자신의 목숨이 천 개가 있으면 그것까지도 다 바치고자하는 선교사님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교회를 향해 불평과 비판의 말을 거두고, 오직 사랑의 수고와 희생이 있는 행동하는 십자가를 지는 성도가 될 때, 우리의 후대는 빛나는 믿음의 유산을 이어받게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일에 합력하는 마음을 주시고, 그 일을 위해 사랑의 수고와 희생이 있는 십자가를 짐으로 생명을 살리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목-위기를 기회로 바꾼 야곱
본문 : 창 47:8~10
찬송 : 308장

성경에서 가장 큰복을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 이삭, 요셉이 아닌 야곱이다. 그의 이름은 선민 이스라엘, 이스라엘 12지파의 아버지, 진정한 복을 말할 때 '야곱의 업'이라고 할 정도이며 성경에 가장 많이 기록되었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세월은 "내가 험악한 세월을 살았나이다"라는 표현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오직 믿음 하나로 그 험악한 세월을 이기고 복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첫째, 붉은 것이 끓어오르는 신앙이다.
 
그는 죽(나지드: 끓어오름)을 쑤는 사람이고, 그 죽은 붉은 것이다. 야곱은 인생을 시작할 때부터 가슴 속에 붉은 것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그것으로 장자권을 빼앗고 평생 그 심장을 갖고 살았다. 그것은 바로 예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었다. 지금 위기에 처해 있는가? 그렇다면 나의 심장 속에는 무엇이 끓어오르고 있는가?
 
둘째, 돌베개 예배신앙이다.
 
인생의 고난이 시작되는 캄캄한 밤을 맞이한 그에게 필요한 것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돌베개'를 찾는다. 그 돌베개를 베고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다.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자손을 티끌같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 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야곱이 아침 일찍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벧엘이라 불렀다. 돌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기름부음은 예배신앙이다. 야곱은 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믿음으로 험한 세월을 이기고 승리한 것이다.
 
셋째, 지팡이를 의지하는 신앙이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험악한 세월을 살았던 야곱이기에 그는 그 무엇인가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직 지팡이만 평생 의지했다. 고향을 떠날 때, 삼촌 집에서 양을 칠 때, 얍복강변에서 환도뼈가 부러져 일어날 수 없었을 때도 지팡이를 의지하고 일어나 걸어갔다.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도 그는 언제나 지팡이를 의지했고 죽을 때까지 지팡이 머리에 그 몸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죽었다.
 
그 지팡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내 인생의 험한 세월을 이기고 승리하게 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 십자가 밖에 없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오늘의 기도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 끓어 오르는 믿음, 예수님 의지하여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믿음, 오직 십자가만 의지하는 믿음으로 이 한 주간도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안정순 목사
순천엘림교회

금-성전이신 예수님
본문 : 요 5:1~9
찬송 : 408장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베데스다 연못의 38년된 병자를 치유하시는 내용이다.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당시 유대인들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가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규례대로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이다. 명절에 천부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오랜 전통이자 법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중요한 일을 하시기에 앞서 느닷없이 예루살렘성의 양문이라고 하는 곳 옆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으로 발걸음을 옮기신다. '베데스다'라는 뜻은 원래 아람어 '베티스다'에서 나온 말로'자비의 집'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연못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많은 병자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성전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중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었다. 육적인 질병으로 인한 고통 뿐 아니라 영적인 갈급함을 채울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그 병자들에게 가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지금 성전이신 예수님이 직접 그들을 찾아가신 것이다. 동일하게 성전이신 예수님이 내 인생가운데 오신 사건은 은혜이고 복이다.
 
그리면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무엇을 해주셨는가? 첫 번째,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고쳐주신다. 특별히 베데스다 연못에서 가장 병이 심각한 사람으로 보이는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다. 예수님이 보기에도 이 사람이 가장 불쌍해 보였던 것이다. 천사가 와서 연못에 물을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면 낫는다고 하는데, 그는 절대 먼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무도 그를 부축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를 찾아가신 것이다. 동일하게 예수님은 나의 연약함을, 우리 가정의 연약함을 아시고 찾아오셔서,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시고, 온전케 하시는 성자 하나님이시다.
 
두 번째, 베데스다 연못에 오신 예수님은 참진리를 가르쳐주신다. 지금 왜 병자들이 연못에 모여 있는가? 천사가 그 못에 가끔 내려와 못의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그때 먼저 들어가는 자가 어떤 병이든 다 낫는다는 것이다. 아픈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곧 복음과 같았다.
 
이때 예수님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며 그들이 붙잡고 있던 진리가 허탄한 진리였고, 그들이 경험하기를 원했던 자비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보여주시는 선포를 하신다. 이 시간도 예수님은 우리 가정을 찾아오시고, 우리 가정에 말씀하신다. 그 말씀의 역사가 나의 병을 고치고, 우리 가정의 연약함을 온전케 하고, 오늘 하루도 승리케 하는 줄 믿는다.
 
오늘의 기도
 
성전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우리에게 참진리를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보준 목사
옥포중앙교회

토-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
본문 : 롬 8:5~11
찬송 : 182장

가지에서 떨어진 사과는 반드시 밑으로 떨어진다. 땅에서 잡아당기는 힘, 중력의 작용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날아가는 새는 땅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새가 나는 동안 중력의 법칙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 죄와 사망이라는 중력의 법칙이 아닌, 그것을 넘어서게 하는 성령의 법칙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 가운데 이보다 명쾌한 정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하면 '불' '뜨거움' '은사' '방언' 등을 떠올린다. 성령을 단순히 '능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성령의 인격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성령은 인격이시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성령은 불같이 임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바람같이 임하고 어떤 사람은 비둘기처럼 임하고 또 어떤 사람은 생수같이 임한다. 사람마다 성령을 경험하는 것이 이렇게 조금씩 다른 것은 성령이 인격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을 능력으로만 이해하는 사람은 성령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 하지만 성령을 인격으로 이해하면 우리는 늘 성령과 깊은 사귐을 통해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바울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것은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이다.

 
2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다.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과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다. 그 차이는 갈망의 차이다.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죄악된 본성이 갈망하는 것에 마음을 쏟지만,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갈망하는 것에 마음을 쏟는다. 그 둘은 끝이 다른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본능대로 살면 당장은 편하고 좋아보인다. 하지만 그 끝은 언제나 죽음이다. 반면에 성령을 좇아 사는 영적인 삶은 당장은 고달퍼 보이지만 그 끝은 생명과 평안이다.
 
'기는 신앙' '뛰는 신앙' '나는 신앙'이 있다. 공통점은 '내가 주체가 되는 신앙'이다. 하지만 '붙어 있는 신앙'이 있다. 나는 할 수 없기에 성령님께 꼭 붙어 있는 것이다. 기어도 안되고, 뛰어도 안되고, 날아도 안되는 일들이 붙어 있으면 된다. 성령과 함께하는 삶이 바로 그런 삶이다.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 능력의 성령님께 꼭 붙어있는 것, 그것이 예수 안에 사는 삶이다.
 
오늘의 기도
 
성령의 생각을 따라 살므로 생명과 평안을 누리게 하여 주소서. 변화와 승리의 삶을 살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창근 목사
문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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