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공보 기획> '이주민 선교' 헌신 이근성 장로ㆍ이익성 목사 형제

[ 교계 ]

신동하 기자 sdh@pckworld.com
2016년 06월 08일(수) 09:21

'이방 나그네'의 타향살이 설움을 달래주며 그들과 친혈육처럼 깊은 정을 쌓아가는 형제가 있다.

이근성 장로와 이익성 선교사 형제는 지난 2010년부터 경기도 의정부, 양주, 포천, 동두천 일대 외국인 근로자들과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고국의 사역자로 파송하는 일을 하고 있다. 형 이근성 장로는 서울강북노회 참빛사랑교회 시무장로, 동생 이익성 목사는 같은 교회 파송 캄보디아 선교사로 있다.

이들 형제는 'E-9 비자'로 입국한 근로자와 'D-4 비자' 언어연수생 등을 대상으로 숙식을 제공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신학교에 입학시키는 등 하나님의 일꾼을 키우고 있다.

▲ 이근성 장로(사진 우측에서 두번째)ㆍ이익성 선교사(사진 중앙) 형제와 가족들.

처음에는 참빛사랑교회 주변으로 외국인 근로자가 늘자 "복음을 전하겠다"는 생각으로 형제가 의기투합하며 담임 이춘석 목사와 성도들에게 제안해 이주민들의 한글교육이 시작됐고, 이후 법무부 지정 사회통합 프로그램 운영기관을 세우면서 식사와 친교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다 사역이 확대돼 노회와 기관의 도움을 받아 이주민들의 권익을 보호하며 사명자를 키우는 이주민월드비전센터를 만들었다. 이곳을 찾는 이주민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서신학원으로 인도해 신학을 배우게 하고, 그들이 출신국가 및 같은 문화권 국가에서 복음 전파 활동을 하도록 돕고 있다.

이근성 장로는 "한국 내 이주민 인구의 급증으로 2016년 200만명에 이어 2020년 300만명, 2050년에는 1000만명 시대가 다가 오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허락하신 복음 전파를 위한 크신 은혜"라며 "이에 따라 이주민들에게 교육을 통해 복음이 들어가게 한 후 역파송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2014년 4월 평신도 선교사로 파송한 캄보디아인 클레앙 소바나 씨, 잔타욧 씨와 억다네 씨 부부사역자가 캄보디아 선교지에서 선교센터와 한국어학교를 운영하며 귀한 결실을 거두고 있다.

▲ 국내 거주 외국인 근로자들이 이근성 장로와 이익성 선교사 사역의 결실로 세례를 받고 있다.

최근에는 교계 동역자들의 후원을 통해 캄보디아에 청소년 진흥원(한국명 '이주민 100만명 역파송 훈련원')을 세우는데 일조했다. 현재 이곳에서는 이주민 언어연수 양육자들로 세워질 40여 명이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이익성 목사는 "한국 내 대부분의 이주민들이 'E-9 근로자들'로서 한국에서 교회에 출석한다해도 고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그들의 종교로 되돌아가는 사례가 많다"며 "고국에서 신앙을 계속 이어가며 특별히 주변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 만들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이근성 장로와 이익성 선교사는 집안 3남 2녀의 장남과 막내로, 복음을 전한 이는 셋째 작은아버지였다. 작은아버지는 자신의 5형제를 모두 전도했고, 그 영향으로 이근성 장로는 중학교 2학년때부터 고향의 광주양림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이근성 장로는 조선대학교 전기과 졸업 후 (사)한국화재보험협회에 점검직 사원으로 입사해 산하기관인 방재시험연구원의 교수부장으로 정년퇴직했다. 한 회사에서 30년 간 근속할 정도로 성실하고 근면한 직장생활을 한 이 장로는 신앙생활에도 모범을 보여 신우회를 조직했다.

"대리 직급 시험을 앞두고 하나님께 서원을 했습니다. 신우회를 조직하고 싶은데 말단사원으로 힘이 드니, 진급을 통해 회사에 복음을 전파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대리로 승진하고 나서 직장 내 기독교인을 파악해 그들과 함께 신우회를 창립했습니다."

신우회 활동을 하며 신앙을 두고 시험의 기로에 서는 순간이 있었다. 모 방송국에서 회사측에 화재 진단을 하는 인터뷰이(interviewee)를 요청했고, 교회학교 교사 생활을 통해 언변이 좋던 이 장로가 선택됐다. 그러나 갑자기 방송 리허설이 주일로 잡히며 회사 CEO에게 단호하게 거절의사를 밝혔다.

이 장로는 "경영자가 불신자고 불같은 성격이라 속된말로 '짤릴' 각오하고 말씀드렸는데, 오히려 인자하게 받아주셨다"며 "이 때가 신앙의 터닝포인트로 기억한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담대함을 주셨고, 결국 사내에서 인정을 받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 때가 이 장로에게는 신앙이 가장 뜨거운 시기였다고 한다. 퇴근 후에는 부인 문순희 권사와 동네 폐지를 주워다가 팔아 여전도회 선교사업 헌금으로 내던 시기였다. 정년퇴직 후 부인과 함께 어린이집 운영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지만 봉사와 섬김이 필요한 현장이면 앞장서 뛰어간다.

▲ 참빛사랑교회 내에 위치한 이주민월드비전센터에서 성경공부를 하는 외국인 근로자들.

동생 이익성 목사는 9살 터울의 형에 비해 우여곡절이 많다. 이 목사는 청소년 시절 가출이 일상이던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다 마음을 다잡고 조선대학교에 입학한 후 그룹사운드를 조직해 대학가요제에서 동상을 받은 이력이 있다.

이 목사는 일진그룹에 입사해 전기분야 수출을 담당하다 그 경력을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하며 엄청난 돈을 벌었다. 출석교회에서 헌금액수가 제일 많았다. 하지만 그게 교만이었다.

이 목사는 "교회 입구 게시판에 헌금내역이 게시되는 것을 보며 흡족해 했다. 내 개인 체면과 과시를 즐긴 부끄러운 교만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던 과정에 12년 동안 아이가 없어 기도원에서 기도하고 내려온 후 기적적으로 아이를 갖게 된다. 이러한 체험신앙은 이 목사에게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야겠다는 확신을 준 계기가 됐다.

이후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부도를 맞으며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렸다. 지인의 권유로 미국 이민을 가서 닥치는대로 온갖 중노동을 하다 유치원을 차렸지만 또 다시 부도를 맞아 고꾸라졌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울부짖었다. 이 목사는 이 과정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미국에서 안수를 받았다. 미국 이민 과정에서 이 목사는 인종차별의 설움을 본인이 직접 겪고 주변에서 보았기에 지금의 이주민 사역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 '캄보디아 청소년 진흥원'을 통해 사명자로 교육을 받고 있는 캄보디아 현지인들.

이 목사는 현재 캄보디아와 한국을 오가며 사역하고 있다. 이 목사는 "하나님께서는 이주민 영혼구원을 위해 이방인의 목사로 세우시고 섬기는 길을 가게 하신 것 같다"고 간증했다.

이근성 장로와 이익성 선교사 형제는 앞으로의 사역 계획에 대해, "2016년 캄보디아 근로자의 한국 송출과 관련해 시험 대기만 7만명이 등록하고 이중 7000명 정도가 한국에 간다"며 "한국어 시험을 준비중인 학생들과 프놈펜을 비롯해 주요도시 공장 젊은이들에게 도시교육선교를 목적으로 한국어학교를 설립하고 예배에 참여하게 하는 사역을 실천하고 있다. 앞으로 캄보디아 주요 7개도시에 한국어학교 선교센터가 세워지길 기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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