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5월 9~14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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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5월 04일(수) 17:19

월-예배와 영성
본문 : 행 13:20~23
찬송 : 304장

예배란 무엇일까? 예전에는 예배를 본다라고 했는데 요즘은 예배를 드린다고 말한다. 본다는 구경의 의미가 있다. 남들이 드리는 것을 구경하고 관망하는 의미이다.
 
그러나 드린다는 것은 구경이 아니라 내가 직접 참여해서 드리는 것이다. 내가 주체가 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드린다는 의미이다. 몸, 마음, 삶을 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옛날에는 나 대신에 짐승을 잡아서 드렸다. 내가 죽는 것이 예배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다. 개역한글성경은 '내 마음에 합한 사람', 현대인의 성경은 '내 마음의 드는 사람이다'고 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먼저, 다윗은 하나님의 명예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쟁 중이었다. 사울 왕과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 군대 앞에서 벌벌 떨고 있을 때 다윗이 나와서 외친다. 강하고 담대한 모습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이라도 내어놓았던 마음이 다윗의 예배 영성이다. 다윗은 자신의 자존심이 짓밟히고 공격당할 때는 한없이 관대했으며 비난이나 애매한 고난도 감내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조금이라도 손상되는 것 같으면 사자 같은 전사로 돌변했다.
 
요즘 여러분이 화를 내는 것은 어떤 것인가? 삶의 우선순위, 절대적 가치는 무엇인가?
 
예배는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고 주님을 내 삶의 최고의 자리에 모시고 높이는 자리이다. 나는 예배자인가?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예배에 목숨을 걸 수 있기를 원한다.
 
다음으로 다윗은 왕이 된 후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옮겨 오는 일을 한다. 다윗이 방치되어 있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왔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최우선순위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성전의 기초를 놓는 일이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었다. 다윗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있었다. 법궤가 돌아오는 날 얼마나 좋은지 덩실덩실 춤을 춘다. 이러한 다윗을 보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땠을까?
 
마지막으로 다윗은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성전을 건축하고자 한다. 그러나 전쟁에서 흘린 피로 인해 자신이 성전을 건축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실망하거나 원망하는 마음 없이 온힘을 다하여 성전 건축을 위한 재료들을 준비한다. 아들 솔로몬의 시대에 성전을 건축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준비를 한다. 우리 모두 다윗처럼 그리 아니하실자라도 감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자.
 
오늘의 기도
 
모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시열 목사
참사랑교회

화-우리는 아둘람의 가족이다
본문 : 삼상 22:1~2
찬송 : 291장

가정은 세상 가운데 있는 안식처요, 피난처다. 다윗이 사울왕을 피해 간 아둘람 굴은 하나님의 피난처, 하나님의 집이었다. 다윗은 친구 요나단의 도움으로 기브아(왕궁)에서 도망쳐 라마, 놉, 가드, 아둘람, 모압으로 도피생활을 한다. 탈출한 다윗은 마침내 아둘람 굴에 숨는다. 다윗이 이곳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 문제에 시달리다 도망다니던 사람들,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사람 400여 명이 다윗에게 몰려들었다. 아둘람 굴 안에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모였을까?
 
첫째, 가족은 환난을 함께 당한다. 환난은 생각지도 않은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로 인해 근심하는 것을 말한다. 험악한 세상에 살면서 환난을 만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아둘람 굴에 모인 사람들도 환난 당한 자들이었다. 가족 중 한 사람의 어려움은 모두의 것이다. 서로 염려하고 너의 것도, 내 것도 우리의 것이 된다. 이 무거운 짐들은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부를 때 응답이 온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우리는 날마다 부활의 주님께 나아가서 환난을 면하도록 간구하며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
 
둘째, 가족은 서로 빚지고 산다. 아둘람 굴에는 빚진 자도 왔다. 다윗은 그들을 받아 준다. 이것이 바로 가족이다. 가족은 서로에게 빚쟁이다. 부모에게 빚지고 은혜라고 한다. 남편, 아내에게 빚지고는 부부애라고 한다. 이렇게 빚지고 고맙다고 하면 마음이 얼마나 가벼워지겠나?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믿는 자는 구원이, 사랑이, 은혜가 빚인 줄 알고 섬겨서 갚아야 한다.
 
셋째, 이제는 마음의 원통함을 풀어라. 작은 차이가 다툼을 만들고 갈등을 만들고 상처를 주고 받는다. 여기서 생기는 감정이 원통함이다. 이것이 가장 많은 곳이 가정이다. 한나도 아이를 낳지 못해 무시당했다. 그러나 한나는 기도하는 여인이었다. 원통함을 사람들에게 하소연 하지 않고 여호와 앞에 가서 풀었다. 마침내 한나의 기도가 응답되어 아들을 얻는다.
 
아둘람의 뜻은 피난처, 은신처이다. 아둘람굴은 오늘날 가정이요, 교회다. 가정, 교회 안에서는 먼저 예수님을 만나고 십자가 사랑을 체험해야 한다.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을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돌봐야 한다. 그러면 마침내 그들은 큰 믿음의 용사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 받을 수 있다. 오늘날 가정, 교회도 언제든지 피난처, 은신처가 되어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전해야 한다.
 
오늘의 기도
 
가정이 무너지고 있는 이 시대에 교회가 아둘람 굴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순보 목사
구래중앙교회

수-자녀들에게
본문 : 엡 6:1~3
찬송 : 579장

본문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복을 약속하고 있다. 우리가 성공하고 장수하는 복을 받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다. 우리는 부모를 공경해야 할 이유가 있다.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과 같이 부모님을 통하여 나를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처럼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부모는 하나님의 계시자이다. 우리는 아버지를 통하여 엄하시고 의로운 아버지 같은 하나님을 배운다. 우리는 어머니를 통하여 용서와 자비, 생명을 품는 성령이신 하나님을 배운다. 그래서 부모는 하나님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스승이다.
 
무엇보다도 부모 공경은 하나님의 계명이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엡 6:1~2)…"
 
성경에서 최고의 효자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효자가 되시려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그래서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효자는 땅에서도 복을 받는다.
 
어느 날 임금님이 시골로 행차를 하는데 사람들이 이를 구경하려고 길가에 모여들었다. 이때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가 임금님 한번 보고 죽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이 자기 등에 업고 땀을 흘리면서 서 있었다. 임금님이 행차를 멈추고 "너는 어찌하여 노인을 업고 있는고?"라고 물을 때 사실대로 대답했다. 임금님은 "그대는 참으로 효자로구나!"라며 상을 주었다.
 
그런데 이웃 마을에 불효자가 있었다. 자기도 상을 받고 싶어서 안 가겠다는 어머니를 억지로 업고 왕의 행차하는 길목에 서 있었다. 왕이 그것을 보고 "이 고을에는 효자가 많구나! 참 기특한 일이로다 이 사람에게도 상을 주어야겠구나"라고 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었던 마을 사람들이 어이가 없어서 "임금님, 저 사람은 천하에 불량한 자입니다. 상 받으려고 그저 효자 흉내를 낸 것이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임금님은 껄껄 웃으면서 "흉내를 내도 효자 흉내를 내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며 이 불효자에게도 상을 후하게 주었다고 한다.
 
효자는 하나님이 알아주고 사람들이 알아준다. 효자는 하늘이 돕고 사람이 도와준다. 그래서 효자는 성공한다.
 
오늘의 기도
 
태초에 가정을 만드시고 부모를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함으로 이 땅에서 잘되고 건강한 복을 더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정표 목사
범물제일교회

목-어린아이들과 같이 되라
본문 : 마 18:1~4
찬송 : 187장

예수님은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4절에서 '자기를 낮추는 삶'이라고 간단히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과 자기를 낮추는 것 사이에 또 다른 의미가 있지는 않을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 것이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어린아이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길인지가 거기서 선명해지는 까닭이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길은 덕을 갖추는 길이다. 많은 이들이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을 말하는데, 그와 함께 고려해야 할 어린아이의 한결같은 특징으로 '여림'과 '부드러움'을 꼽을 수 있다. 어린아이의 장기는 여리고, 그 뼈와 근육은 부드럽다. 그러기에 여림과 부드러움을 덕목으로 갖추는 것의 중요성을 이르는 말이다. 특히 '어린아이가 되라'고 하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한 가르침에서 사람의 됨됨이에 대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뼈나 근육, 또는 장기의 문제가 아닌 인격의 문제라는 말씀이다.
 
여리고 부드러우면 당연히 너그럽게 된다. 경직된 사고와 행동은 거칠고 공격적이기 쉬우며, 편견이나 아집에 빠지는 것도 그만큼 쉽다. 그런 사람과 같이 있으면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되는데, 그리스도인의 삶이 남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그것은 실패한 신앙이므로 아주 경계해야 할 일이다.
 
나이를 먹거나 다양한 경험을 한 것, 그리고 특정 지위에 있게 되는 경우 경직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경직된 사고와 언어, 행동이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언제나 후유증이 남을 수 있다. 너그러움이 끼어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너그럽지 못한 이가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여리고 부드러우며 섬세함을 지닌다면 그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삶을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 8절에서 '바람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다시 가르치신다. 물론 바람 같은 사람이라는 말은 기본적으로는 자유로움을 뜻한다. 그러나 여기에 형태가 고정되어 있지 않은 됨됨이를 포함한다. 남을 판단하지도 규정하지도 않으며 특히 단죄하지 않는 삶이 곧 바람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결국 사람을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또는 일을 함께 할 때 다른 이들이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때 의도하지 않아도 빛과 소금의 기능과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역사 앞에서 꺼지지 않는 횃불이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나 자신을 단단하고 크게 강하게 만드는 것으로 하나님을 멀리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부드러움과 너그러움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지혜로운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기해 목사
광천교회

금-가죽옷의 은혜
본문 : 창 3:21
찬송 : 305장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을까?
 
무화과나무는 히브리인의 사고로 '쉼 또는 묵상'이라는 속성을 갖고 있다. 잎이 커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까닭에 무화과나무 그늘은 성경시대에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무더위를 피해 집에서 나와 율법을 읽고 묵상하는 쉼터였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하시는 말씀 중에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노라(요1:48)"는 말씀도 그가 율법을 묵상하고 있을 때 봤다는 뜻이다.
 
그런데 죄는 묵상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회개해야 되고 하나님이 용서해 주셔야 해결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무화과 나뭇잎 대신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다는 것은 이미 한 마리 짐승의 피를 흘렸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죽옷은 구속사적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가죽옷은 히브리어로 오르(가죽)와 케토네트(옷)의 합성어로서 각 단어의 히브리어 알파벳  가운데 '못'이라는 뜻과 '자유, 연합'이라는 상형문자로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는 것이다. 그렇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죄에서 자유를 얻었고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시기 위해 한 마리 양을 잡아 죽이실 때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는 양을 지켜봐야 했던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온 땅에 어둠이 임했다는 말씀이 결코 단순한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그만큼 아버지로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하다. 아마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 십자가의 사랑 때문이리라.
 
가정의 달을 보내면서 소위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돌아 볼 때 그들의 원죄를 탓할 수만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심사(心思)일까?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죄를 묵상했을 우리의 조상이 오히려 측은하다는 마음마저 든다. 부디 그 가죽옷에 새기신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의 가정에 햇빛처럼 빛나기를 소원한다.
 
오늘의 기도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은혜를 감사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양록 목사
성광교회

토-12지파의 탄생
본문 : 창 29:31~35
찬송 : 299장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시조가 되는 야곱의 열두아들의 탄생 과정을 보여준다. 성서시대의 이스라엘의 정치구조의 근간은 지파연합체제이다. 그러므로 지파들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다.
 
12지파의 기원은 야곱부터 시작된다. 그는 축복을 받기 위해 큰 물의를 일으킨 후 외삼촌 집으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라헬과 사랑에 빠진다.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사랑을 성취했지만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야곱의 가정에서는 어떤 로맨틱한 장면도 발견할 수 없다. 다만 두 여인이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 다툼이 이어질 뿐이다. 이제 욕망의 주인공은 두 여인들이고 야곱은 두 여인의 다툼에 시달리는 연약한 모습이다. 거룩한 믿음의 가정의 경건한 모습이 아닌 인간적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두 명의 여인들과 그들의 두 명의 하녀들이 자녀를 낳는 과정, 그 가운데 나타나는 여인들의 절박감은 오직 자녀를 낳음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가치를 인정받는 당시의 왜곡된 가정의 모습을 보여준다. 성경의 이야기가 하나의 전설, 신화라면 이렇게 기술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뭔가 거창하고 신비한 이야기들로 채색이 되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성경은 인간적인 이야기들을 가리거나 채색하지 않는다. 일상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더 깊은 하나님의 뜻의 드러남을 보여준다.
 
네 명의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12명의 아들들은 그들의 탄생의 과정에서의 갈등을 그대로 그들의 삶에 지니어 이후 서로 다투고 갈등하며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이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시고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예비하신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라고 하기에는, 거룩한 성령의 전이라고 하기에는 그 안에 슬프고 아프고 부족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갖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적인 연약함도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면 은혜의 통로,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오늘 본문은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삶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모습들을 통해 선을 이루어 가신다. 오늘도 우리의 삶의 평범한 하루 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우리의 부족한 삶의 자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자. 우리 가정도 하나님께서 친히 어루만지시고 축복의 통로로서 세움을 받게 되기를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부족한 자들을 들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에 우리 가정을 맡깁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명윤 목사
현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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