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5월 2~7일

[ 가정예배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6년 04월 29일(금) 10:10

월-형제 사랑
본문 : 요일 2:7~11
찬송 : 220장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계명들을 기쁨으로 계속 지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주님이 주신 계명이다.
 
만일 형제를 사랑하는 일에 실패를 하면 신앙생활을 하는데 참으로 많은 지장을 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축복들을 잃어버릴 수가 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옛 계명'도 되고 또한 '새 계명'이기도 하다. 그 말씀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구약성경 레위기 19장 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래서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래전에 주어진 이 옛 가르침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옛 계명이면서 또한 새 계명이라고 했던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을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취어진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인들을 일컬어 '하나님께서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라고 말한 것이 그런 의미이다. 그는 그리스도인 된 자들에게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였다. 요한이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라고 한 말도 같은 뜻이다. 불신자들은 어둠에 둘러싸여 있을 뿐 아니라 어둠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에 어느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지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면 첫째로 눈이 열리고 새로운 영역에서 거주하는 새 사람이 되기 때문에 예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일인 형제 사랑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만일 여전히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는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그런데 감정에 의해서 형제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감정에 따라서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그 사람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운 일이 발생할 때 사랑이 미움으로 바뀐다. 성경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할 때는 감정적으로 그를 좋아하라는 말이 아니라 의지적인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즉 사랑하는 감정의 마음이 없어서 끌리지는 않아도 사랑을 결심으로 사랑의 행위를 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원수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의지적인 사랑을 보여주면 자신과 상대의 눈을 멀게 한 어둠이 물러간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 가운데서 교제하게 된다. 그러나 의지적으로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대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 외에는 결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으므로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기를 바라신다.
 
오늘의 기도
 
우리를 사랑하되 생명을 바쳐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서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재옥 목사
천안남부교회

화-되돌리시는 하나님의 은혜
본문 : 룻 4:11~17
찬송 : 400장

우리는 본래 죄와 허물로 인해 버려진 나무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버려진 나무와 같은 나를 주우셨다. 뿐만 아니라 사랑의 끌로 우리를 깎아 주시고 다듬어 주셨다. 하나님께서 깍아주시고 다듬어 주실 때에는 너무나 아파서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아픔을 주시고 고통을 주시는가?'하고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니 하나님께서는 나를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드시기 위한 것이었다.(장 페에르 드 코사드의 '지금 이 순간의 순종') 버려진 나무와 아름다운 작품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끌로 인한 상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끌로 인한 상처가 하나도 없는 나무는 버려진 나무이다. 그런데 끌의 흔적이 있는 나무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만드시고 계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창조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늘 빛보다는 어두움을 바라본다고 하는 것이다. 세상을 보고 다른 사람을 볼 때 어두움을 바라보고 미워하고 분노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볼 때에도 어두운 면을 바라보며 수치스러워 하기도 하고 감추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는 다른 사람의 어두움이나 나 자신의 어두움을 보기 보다는,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이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빛 안에서 타인의 어두움과 나 자신의 어두움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화해할 수 있는 자가 된다. 그 때부터 우리는 모든 것을 되돌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갈 수 있다. 룻의 가정은 본래 어두움으로 시작하였지만, 말씀을 듣고 빛으로 나아갔을 때 모든 것을 되돌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찬송하는 가정이 되었다.
 
첫째로 자신의 어두움을 깨닫고 말씀이 들리는 선택을 했다. 룻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말씀의 인도함을 따라서 모압 땅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향하였다.
 
둘째로 작은 일에 충성하였다. 그녀는 이삭을 줍는 작은 일에 믿음으로 순종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보아스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룻의 가정을 회복시킬 자였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만남을 통해 어두웠던 모든 것들이 찬송의 재료가 되었다. 베들레헴 사람들은 룻과 보아스의 결혼을 축하하며 동시에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하나님께서 룻과 보아스 그리고 나오미를 통해 영광받으실 것을 찬양했다. 찬양에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아들을 통해 룻의 가정이 유명하게 되고, 다윗의 가문을 이루고,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시는 복된 가문이 되는 일이 일어났다.
 
오늘의 기도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며 찬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노철규 목사
상일교회

수-가장 값비싼 보석
본문 : 요 15:12
찬송 : 503장

한 보석상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여러 보석을 이것저것 살피던 손님이 한 보석을 가리키며 "이 보석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데 가격이 왜 이렇게 비쌉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보석상 주인은 아무 말 없이 그 보석을 두 손으로 감싸듯 어루만졌다. 잠시 후 손을 펴자 그 보석은 무지갯빛으로 아름답게 빛났다.
 
보석상 주인이 손님에게 말했다. "오팔은 사람 손으로 따뜻이 감싸주면 아름다운 빛을 낸답니다. 그래서 가격이 비쌉니다"라고 답했다. 많은 가정의 아내, 남편, 자녀의 가슴이 냉랭하게 식어 있다. 그래서 보잘 것 없이 보인다. 하지만 우리의 두 손으로 꼭 감싸주면 오팔처럼 빛날 것이다. 기독교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사랑'이다. 성경 전체를 녹여서 한 단어로 만든다면 '사랑'이다.
 
기독교에서 성경에서 사랑을 뺀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다. 그래서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고 죄에서 벗어나고 죽음을 이길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흔들리고 변한다. 이렇게 변하는 세상에서 우리 둘만은 절대로 변치 않겠다고 많은 이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이 결혼식이다. 그런데 이런 세상 속에서 살다보면 어느새 흔들리고 변해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런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우리 가정이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위에 서야 한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새 계명을 굳게 지키는 것이다.
 
교회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엄마가 물었다. "교회에서 뭘 배웠니?" 아이가 대뜸 성경책 위에 올라섰다. 버럭 화를 내는 엄마에게 아이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말씀 위에 굳게 서라고 배웠어요. 누가 뭐라고 해도 절대로 흔들리지 말고 굳게 서야 한다고요."
 
사랑은 반드시 지켜야 될 새 계명이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은 십계명 말고 새 계명을 주셨다.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계명은 지키면 좋고 안 지키면 그만인 것이 아니다. 반드시 지켜야 한다. 서로를 두 손으로 꼭 감싸 모두가 다 보석되어 행복한 가정의 달을 맞이하시기를 축복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온통 흔들리고 빠르게 변화합니다. 말씀 위에 굳게 선 우리 가정은 사랑으로 든든히 서갈 줄 믿습니다.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감싸줘 보석 같은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양진 목사
월광비젼교회

목-아내를 귀히 여기라
본문 : 벧전 3:7
찬송 : 220장

한 가정의 행복은 남편과 아내, 즉 부부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런 남편과 아내에게 서로에 대해 지켜야 할 도리가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신다. 하나님은 아내들을 향하여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신다.
 
그러면 남편들에게는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고 계실까? 하나님께서는 남편된 자들에게 아내와 동거하고, 아내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고 하신다. 연약한 그릇은 깨지기가 쉽다. 그래서 함부러 다루지 않고 조심스럽고 소중하게 다룬다. 이렇듯 아내에게도 그리하라는 것이다. 아내들은 남편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를 입고 아파할 수 있으므로 남편은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
 
또 한 남편은 아내를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은 자' 곧 천국까지 함께할 믿음의 동반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남편들에게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과 같이 하라고 하신다. 이것이 아내를 귀히 여기는 것이다.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으므로 하나님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되리라고 하였는즉 부부는 둘이 아니요 한 몸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남편들에게 자신과 한 몸인 아내를 제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곧 남편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아내를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일까? 이는 남편이 자신의 몸을 잘 보살피듯이 아내에게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남편이 배가 고프면 '아내도 배가 고프겠구나.' 남편이 추우면 '아내도 춥겠구나'라고 생각하는 등 모든 면에서 돌아보는 것이다. 또, 내가 이해 받기 원할 때면 아내도 이해 받기 원하고, 내가 용서받기 원할 때면 아내도 용서받기 원하고, 내가 섬김 받기 원할 때면 아내도 섬김 받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그 마음을 살피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이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남편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며, 아내를 미워하고 괴롭게 하는 것은 남편 자신을 미워하고 괴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게 하듯이 아내를 사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린다.
 
그렇다면 남편은 왜 아내를 귀하게 여기고 제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까?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라." 즉 아내를 귀히 여기지 않고 괴롭게 하면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내를 귀히 여기지 않고 마음을 상하게 하였거나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하였다면, 아내의 마음을 살펴보고 그 마음을 풀어주어야 한다.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행복이 가득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오늘의 기도
 
남편된 자는 아내를 사랑하므로 기도가 응답되고 가정이 평안하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행복이 가득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길윤 목사
김해한빛교회

금-멀찍이 선 베드로
본문 : 마 26:57~68
찬송 : 330장

미국의 9ㆍ11일 테러 당시에 한 비행기 안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였다고 한다. 자신들의 위험과 죽음을 인식한 승객들이 '무엇인가를 하자'는 말과 함께 테러범의 무기를 빼앗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결국 그 비행기는 목표지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추락하고 만다.  자신들이 죽는다는 사실을 돌이킬 수는 없었지만 워싱턴 DC는 구할 수 있었다.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는 생각에 일어서는 사람은 용감한 사람이다. 일어선다는 것은 참여하는 것이요, 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구경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겁에 질려 일어나기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감당하는 것이 귀찮고 어려워 일어나기를 포기하기도 한다.
 
본문에서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님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사도 베드로이다. 심지어 그는 예수님과 연루되는 것이 두려워 모른다고 부인하고 있다.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이 순간만큼은 모든 사람들이 그저 구경꾼에 불과하다. 70인의 제자들, 12명의 사도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를 외쳤던 그 관중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숨어 있을 뿐, 나서는 사람이 없다. 모두가 관망족일 뿐이다.
 
지켜만 보는 사람들의 특징은 앉아 있는 것이다. 팔짱을 끼고 있는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얌전하고 온유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언제나 일어날 것을 명령한다. 말씀은 언제나 일어나라, 비추라, 행하라, 가라, 외치라고 전한다. 우리에게 무엇인가 감당하기를 명령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일어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신앙적 고백이다. 결심을 표출하는 행동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하루의 삶도 일어남에서 시작한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도 사람들이 멀리 서서 구경만 한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저 바라만 볼 뿐이지 나서질 않는다. "기도합시다"라고 하면 구경만 한다. "전도합시다"라고 하면 바라만 본다. "성경 읽읍시다"라고 하면 좋다고 동의만 할 뿐이지 감당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많은데 나서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예수님도 추수할 일꾼이 없음을 탄식하고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사명을 이루기 위해 무엇인가를 감당하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구경꾼인가, 아니면 헌신함으로 참여하고 있는 동역자들인가?
 
함께 헌신하는 동역자, 전도와 선교의 처소에 함께 외치는 동역자, 말씀을 나누고 교제를 나누는 믿음의 동역자들이 필요하다. 나를 필요로 하고,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달려가야 한다. 이젠 구경꾼이 아닌 동역자로 살아가자.
 
오늘의 기도
 
게으름과 나태함을 던져버리고 신실한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영석 목사
대구제이교회

토-요셉의 인간 승리
본문 : 창 41:37~45
찬송 : 310장

얼마 전 바둑기사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을 지닌 알파고가 대국을 치렀다. 결과는 알파고가 4:1로 이겼다. 이세돌이 못해서가 아니라 알파고가 150대의 연산처리 능력을 가진 컴퓨터의 도움을 받기에 질 수밖에 없었다. 바둑판이라는 평면위에서 수평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보다 위로부터 수직적인 도움을 받는 알파고가 유리하다는 것이 입증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판을 이겼다는 것은 이세돌 9단의 천재성을 보여준 것이다.
 
오늘 본문은 요셉의 인간 승리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온갖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도울 때 요셉은 승리자가 되었다. 어떻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수직적으로 위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 해몽하는 재능을 주었으며, 꿈의 내용뿐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자세히 알려주므로 애굽왕으로부터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는 칭찬과 함께 애굽의 총리로 발탁되었다. 하나님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알 수 없는 것을 알게 해서 인간승리자가 되게 하시는 분이다.
 
요셉이 17세의 소년으로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에 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요셉이 꾼 꿈을 이루려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신의 감동을 입었다는 것은 신적인 지혜를 하나님이 주었다는 말이며, 요셉이 수평적인 생각을 넘어서 수직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과 연결된 수직적인 생각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지혜이며, 하나님은 자신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이 지혜를 주어서 인간승리자가 되게 하신다. 예수님도 수직적인 생각으로 사셨기에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혜로 인간 승리자가 됐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와 하나님으로 믿고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시고 하나님의 지혜를 주어서 인간승리자가 되게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수직적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기 원하신다. 어떻게 하면 요셉처럼 인간승리자가 될 수 있을까?
 
첫째, 하나님이 주신 꿈인 비전을 가져야 한다. 둘째,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가 돼야 한다. 셋째,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며 섭리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결론적으로 위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를 맺고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살 때 하나님은 지켜주시고 지혜를 주실 뿐 아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섭리하시며 악이 변하여 선이 되게 하셔서 인간 승리자가 되게 하신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어려운 시대를 사는 우리로 하여금 요셉처럼 수직적인 생각으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웅주 목사
전민제일교회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