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신학 신지식인을 찾아서(4) 하비콕스 교수

[ 연재 ] 현장서 보고 만나고 대화하며 세상에 종교적 가치를 전한다

안재웅 박사
2016년 04월 19일(화) 16:45

미국 하버드대학교 신학대학원 하비 콕스 교수는 침례교 목사이자 학자이고 저술가이자 반전운동가이며 반핵운동가로, 또, 인권운동가이자 평화전도사라는 호칭이 따라 붙는다. 금세기 대표적인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콕스의 삶과 사상을 소개한다는 것은 시각장애인이 코끼리 만지고 난 소감을 피력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콕스의 신학사상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그의 삶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콕스는 17세 말 종교의 박해를 피려 영국 웨일즈로부터 펜실베니아의 말번이라는 작은 마을로 이민해 온 조셉 콕스가 중시조다. 하비 콕스는 침례교 목사가 되어 말번침례교회 담임목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펜실베니아대학에서 유럽역사를 전공하고 우등생으로 졸업한다. 콕스는 목사가 되고자 예일대신학대학원에 진학한다. 그가 예일에 있을 때 침례교 학생들이 성공회로 옮기는 것을 목격한다. 답답한 침례교를 떠나 진보적인 성공회로 신분 상승을 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콕스는 침례교에 남는다.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대 신학대학원으로 옮긴 후 제임스 루터 아담스 교수의 지도를 받고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는 박사학위과정과 앤도버뉴튼신학교 강의를 병행한다. 1962년 초, 콕스는 신학교 친구인 로버트 스타벅의 초청으로 독일 서베르린에 소재한 고스너선교기관의 에큐메니칼 협동사역자로 2년 동안 일한다. 그는 동베를린을 매주 두 세 차례 주기적으로 방문하고 동베를린 목사들과 학자들을 만났다.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상ㆍ하권을 이들에게 전하고 함께 공부한다.

그는 (동ㆍ서독 국경의) 찰리검문소에서 동독 관리로부터 의심분자로 찍혀 몇 차례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에릭 바서만이란 젊은 막시스트 학자를 만나 기독교와 막시즘에 관해 토론 한다. 콕스는 이 때의 대화를 크리스찬-막시스트 다이알로그의 초창기라 부른다. 금세기 에큐메니칼 역사에 커다란 획을 긋고 에큐메니칼 운동을 필생의 과제로 삼는다.

1963년 말, 보스턴으로 돌아와 흑인 밀집 주거지역인 록스버리에 자리잡고 1970년까지 머문다. 그곳에서 흑인들의 가난과 차별, 소외, 좌절, 인종차별의 현장을 몸소 경험한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행진 때 만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가까워진다.

킹의 초청으로 노스 캐롤라이나 윌리엄 스톤 인종차별 철폐집회에도 참석한다. 이 일로 60명이 유치장으로 연행된다. 콕스도 11명의 백인 목사와 함께 갇힌다. 백인과 흑인을 분리해 수용하자 백인 목사들이 단식하며 흑인과의 합방을 요구했다. 4일이 지나서야 콕스를 포함한 4명의 백인이 흑인과 합방하게 된다. 백인과 흑인의 차별상태가 현격하다는 것을 체험한다. 흑인이 감옥에 갇히면 수치스럽게 생각하지만 백인은 영웅행세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콕스는 많은 것을 몸소 느끼고, 배우고, 깨닫는다.

그리고 1964년, 약관 34세에 첫 번 째 저서 '세속도시'를 출간한 후 큰 명성을 얻게 된다. 이 책은 익명으로 살아가는 세속도시의 현대인을 여러 측면에서 조명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익명성을 내세워 현대인의 종교사회심리를 파헤친다. 이 책은 수 십 개 언어로 번역 돼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는 하버드대 교수로 자리잡고 강의와 연구와 저술에 몰두한다.

1968년, 마틴 루터 킹과 로버트 케네디가 흉탄에 피살된다. 충격적인 사건을 계기로 그는 일년 간 남미 멕시코로 떠나 스페인어를 익힐 겸 해방신학 공부에 열중한다. 브라질의 칼빈 신학자 루벤 알베스가 쓴 해방신학 원고를 읽고 '해방신학'이란 제목으로 영문판 출간을 돕는다.

남미해방신학의 첫 번 째 영어책을 선보인다. 그는 멕시코 침례교신학교에서 강의하는 동안 여러 해방신학자들과 교류한다. 남미 해방신학자들은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이 연구의 중심과제라는 사실을 파악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엑소더스 모티브를 남미 해방신학자들이 원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해방신학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학자로 알려진다.

1978년 여름, 그는 히로시마를 방문하고 원폭기념제단에 꽃다발을 바친 뒤 돌아서려다가 갑자기 다리가 굳어지는 경험을 한다. 하나님이 그에게 히로시마의 의미를 알리려는 순간으로 받아 드린다. 얼마쯤 지나 캘리포니아의 여론조사 결과를 신문에서 보게 된다. 질문은 딱 두가지로, '당신은 핵전쟁이 일어난다고 보는가'와 '당신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이 질문에 84%의 응답자가 전쟁은 일어날 것이며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 대답했는데 이 결과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하버드대 학부생과 여러 대학원생 100명에게 똑같은 질문으로 여론조사를 한다. 무려 85%가 비슷한 응답이 나오자 콕스는 불분명한 미래를 준비하며 공부하는 이들을 가엽게 여긴다. 그는 미국 여러 지역의 핵 관련 기지와 연구소를 추적한다. 그리고 동지들을 규합해 반전, 반핵 운동을 펼친다. 베리건 형제와 도로시 데이 등과도 연대해 핵 없는 세상 운동을 펼친다. 핵의 폐기와 평화운동을 동시에 진행한다.

콕스는 수 많은 명저들은 모두 현장에서 보고, 만나고, 대화하고, 연구한 자료를 토대로 썼으며, 강의와 토의, 저서, 명상의 원천이 된다. 유럽과 아시아, 러시아, 중남미, 아프리카, 중동과 바티칸을 오가며 얻은 경험을 학생과 동료, 신자, 독자들과 나눈다. 이것이 콕스가 신학하는 방법이며 새 책을 낼 때마다 베스트 셀러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CCA총무로 2002년 8월, 아시아기독교협의회 (CCA) 창설 45주년 기념강연 겸 에큐메니칼 정책협의회 주제강사로 스승인 하비 콕스 교수를 모셨다. 그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종교적 가치'에 관한 강연은 큰 감동과 인상을 남겼다. 우리는 스승과 제자로 만나 옛정을 나누며 홍콩에서 몇 날을 즐겁게 지낸 일이 있다.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