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만 바라보는 광야훈련학교

[ 땅끝에서온편지 ] <2> 첫 사역지 푸껫한인교회

홍경환 선교사
2016년 04월 14일(목) 11:34

1년간 태국에서 견습선교사의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필자는 교단 총회 세계선교부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교단 선교의 전체를 이해하고 선교사들을 섬기는 일에 많은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이곳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에 부담이 느껴졌다. 매 회기마다 선교지로 향하는 분들을 볼 때 하나님께서 '너는 무엇하고 아직도 안 나가고 버티고 있니?'라고 물으시는 것 같았다.
 
이런 마음의 고민을 가지고 있던 차에 호주에서 청소년들과 유학생들을 위한 사역자로 요청을 받게 되었다. 주저하지 않고 단기선교사로 파송을 받았고 가족들과 함께 날아간 곳은 호주였다. 그런데 이삿짐을 다 보내놓고 출국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듣지도 보지도 못한 IMF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약속을 해 놓은 사역지에 가지 않을 수 없었기에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가지고 갔던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후원을 약속했던 교회들로부터 아무 응답이 없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사람들을 많이 의지했던 것을 철저히 회개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광야훈련학교였다.


아내와 나는 오피스크리닝을 하는 집사님 내외와 같이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해야만 했다. 교회에서 주는 사례비로는 집세를 내고 일한 돈으로는 생활비하기에 바빴다. 유치원에 다닐 나이의 딸들을 유치원에 보낼 형편이 못되었다.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이 우유가 떨어지면 우유 대신 보리차를 먹여야 할 때도 있었다. 매일 두 딸에게 아무도 문을 열어주면 안된다고 말하고는 집을 나서서 이곳저곳을 청소하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잠을 설쳐가면서까지 일을 하고 돌아오는데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젊은이들을 도우며 복음을 전하고자 왔는데 오히려 그들의 도움을 받고 있는 모습을 깨닫게 되자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 계속 남아 있는 이유도 발견하지 못했다. 니느웨로 가야 하는데 다시스로 왔으니 돌아가야 했다.
 
선교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번엔 후원교회와 기도후원자들을 열심히 찾아서 후원을 부탁하고 태국 선교를 위한 장기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한국교회가 6.25전쟁의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56년 해방 후 첫 선교사(최찬영, 김순일선교사가정)를 보낸 나라가 태국이다. 1955년 방콕의 아시아교회협의회의 창립을 위한 모임에 한경직 목사가 참여하여 태국 교단을 만나 자리에서 태국 교단의 선교사 요청을 받음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는 최초의 두 교단 간의 선교협력이었고 이 동반자적 선교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태국기독교단과 태국현지선교회는 우리 가족을 태국 남부지역의 사역으로 안내해 주었다. 목회자가 없어 한국에서 보내온 설교테이프를 들으며 예배를 드리고 있던 몇몇 사람들과 함께 푸껫한인교회를 다시 시작했다. 그 당시 아이들을 포함하여 이천여 명의 한인들이 푸껫에 살고 있었고 그 수는 방콕 다음으로 많았다. 흩어졌던 교인들이 하나 둘씩 다시 모이게 되고 그들은 목회자인 선교사를 도와 선교하는 교회를 함께 이루어 나갔다. 그러나 함께 선교하던 꿈같은 시간이 얼마 가지 않아 이 땅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2002년 사스, 2003년 조류독감 그리고 2004년 지진해일까지 해마다 재난이 몰려왔다. 특히 쓰나미가 있었던 2004년 12월 26일 성탄절은 새로운 사역들이 시작되는 첫 주일이 되었다.

홍경환 선교사/총회 파송 태국선교사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