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 낭트 칙령

[ 김인주 목사의 이주의인물 ] 프랑스가 위그노를 인정

김인주목사
2016년 04월 05일(화) 14:39

프랑스 왕으로 1598년에 등극한 앙리 4세는 4월 13일 개신교의 권리를 인정하는 칙령을 선포하였다. 이 칙령은 지명을 따라서 낭트칙령이라 불리운다. 수도인 파리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위그노의 신앙을 용인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오랜 세월에 걸친 신구교의 전쟁이 마무리되었으며, 개신교는 프랑스에서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독일어에서 맹세한 동지라는 뜻의 아이드게노쎈이 프랑스지역에서는 음역되어서 위그노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프랑스 지역의 깔방주의 혹은 개혁교회의 신앙인들을 가리킨다. 메디치가에서 태어난 왕비 그리고 나중에 모후가 되어 프랑스의 권력을 손에 쥔 카트린은 천주교 신앙을 수호하려 애썼다.

어쩌다 공주 마르그리트와 위그노의 왕자 앙리의 혼담이 진전되었다. 1572년 8월에는 만인의 축복 속에 파리에서 성대한 혼례식이 거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는 카트린의 계략이었고, 상대 진영을 몰살시키려는 음모가 진행되었다. 이것이 바돌로매 축제일의 학살이다. 구사일생 목숨을 건진 앙리는 30년에 가까운 전쟁을 지휘하여, 결국 왕위 상속의 권리를 실현시켰다.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겼으며 신교와 구교 신앙을 여러차례 갈아타며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낭트 칙령으로 개신교 신앙을 공인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갈등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조금 숨통을 튼 개신교 신앙이 거대한 천주교 문화 속에서 살아남기는 어려웠고, 다시 법적으로 금지되는 시련을 만나기도 했다. 계속해서 위그노는 압박을 탄압받았고 대부분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이들이 귀족, 지식인, 기술자들이었기에 프랑스로서는 큰 손실이었다. 문화나 과학기술에서 한층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 프랑스 역사에서는 못내 아쉬운 장면이다.


사진/ 앙리 4세와 그의 가족들

 

김인주 목사<봉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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