⑪ 모리츠

[ 김인주 목사의 이주의인물 ] 모리츠 배신을 거듭하다

김인주 목사
2016년 03월 22일(화) 14:50

모리츠 (1521-1553)가 3월 21일 태어났다. 30여년 짧은 삶이지만 그는 종교개혁의 향방을 결정지었다. 제1세대의 제후 중에서 야심을 품고 개혁진영을 주도하던 헤쎈의 필립이 그의 장인이었다. 작센 공작령은 이미 필립 남매와의 교차결혼을 통하여 이중으로 엮인 상태였다. 모리츠가 필립의 딸과 결혼하면서 이제 세 번째로 작센은 헤쎈과 결합한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는 공작일 뿐 선제후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이 육촌 형인 요한 프리드리히가 비텐베르크에 버티고 있는 한 그의 욕망은 채워질 수가 없었다. 신앙적으로는 개신교 진영에 가담했지만, 그는 군사동맹으로 슈말칼덴에 가입하기를 주저하였다. 정치적 욕망을 실현시키기에 그 동맹은 너무 허약하고 위태롭기 때문이었다. 

모리츠는 황제와 비밀리에 약속을 맺게 된다.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면 황제를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벌어지자 그는 선제후령을 일시 점령한다. 곧 격퇴당하였지만 황제는 그에게 선제후의 지위를 주었다. 이때부터 작센의 선제후령과 공작령은 뒤바뀌게 된다. 이제부터 루터교회의 중심은 비텐베르크가 아니고 드레스덴이다.

그러나 그는 황제에게 끝까지 충심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 황제가 약세라고 여겨지는 순간 그는 반기를 들고 황제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거듭되는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그는 일찍 사망한다. 교회분열은 쉽게 해결되지 못하고, 영주들의 뒤틀린 욕망으로 반전을 거듭하자 황제는 세상을 버리고 수도원으로 은거한다.

모리츠는 가룟 유다라고 종종 비난받았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 그의 현실 판단이 종교개혁을 마무리하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의 무덤은 드레스덴과 켐니츠 사이의 프라이베르크에 있는데 그의 고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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