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의 세계를 보는 교회

[ 논설위원 칼럼 ]

박은호 목사
2016년 03월 22일(화) 14:39

필자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던 즈음, 어머니가 사주신 교복을 입어보며 만지작거릴 때 문득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이 교복을 입고, 중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말세지말'(末世之末)이라는 종말론이 한국교회 안에 팽배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적환경 속에서 한국교회 안에는 '종말론 긴급 대성회'나 다미선교회 이장림의 1992년 10월의 재림 휴거설, 직통계시를 받았다며 미혹하는 시한부종말론이 한국교회를 관통하여 지나가면서 교회뿐만 아니라 대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오늘의 교회를 보면 분명 2, 30년 전 한국교회의 영적혼돈과 어지러움과 대비되는 것은 틀림없다. 과거의 그릇된 종말신앙의 영향력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오늘의 교회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더 큰 영적혼돈과 위기에 매몰되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오늘의 교회는 '이 시대의 광장문화(廣場文化)'에 너무 깊이 빠져 있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저 묵시의 세계'를 보는 눈을 잃어버린 시각장애교회가 되고 말았다.

교회들이 오늘의 광장문화에서 '오늘'을 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오늘'에 모든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고도근시의 눈을 가진 교회가 되고 말았다. 미로슬라브 볼프는 교회공동체를 '광장에 선 기독교'라고 했다. 교회가 '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이유는, 광장을 대변하기 위함이 아니지 않는가! 도리어 현실이라는 '광장' 속에 '저 묵시의 세계'를 가져다 심기 위함이 아닌가! 광장 속에 임하는 종말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보여주고 살아내기 위해서 광장 속에 선 공동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저 묵시의 세계'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초월성에 있다. 그 이유는 이 시대의 '광장문화'를 이 시대의 가치로 이야기해 주는 교회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도리어 '저 묵시의 세계'의 초월성에 근거해서 오늘의 '광장문화'를 강력하게 재해석해 주고 그 나아갈 방향을 정확하게 제시해주기 위함이다.

1세기 말 밧모 섬에 유배 된 사도 요한이, 어느 주의 날 저 묵시의 세계에로 초대받지 않았던가! 황제숭배가 만연된 광장문화 속에서 힘겨워하고 부대끼며 교회의 정체성을 서서히 잃어버렸던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은 밧모 섬의 요한이 본 저 묵시의 세계와 종말적인 시간 앞에서, 일순간에 새로운 세계의 눈을 가진 교회들로 '그 시대 광장문화' 앞에 다시 서는 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전환점을 가지게 되지 않았던가! 저 묵시의 세계를 보면서 동시적으로 이 땅의 '광장'을 내려다보는 새로운 영적지평을 가지는 교회가 되지 않던가! 종말적인 승리의 시간을 광장 속으로 가져와서, 광장 속에서 승리하는 교회로 다시 서는 정체성을 회복하는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우리 한국교회는 오늘의 자본주의라는 광장문화 한복판에 서 있는 교회다. 모두들 '경제 경제'하는 광장에 서 있다. 그 동안 교회는 경제 경제하는 이 시대의 광장문화를 뒤쫓다가 글로벌 경제위기와 더불어 찾아온 저성장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자, 더 이상 교회의 존재이유를 상실한 교회가 되고 말았다.

교회가 언제까지, 이 시대의 자본주의라는 광장문화의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어야 하는가?  이제는 저 묵시의 세계를 보고 저 하늘의 세계를 이 땅에 가져오는 교회로, 저 종말적인 승리의 시간을 이 땅에 가져와 하늘의 승리를 선포하는 교회로, 이 시대 광장문화를 떠나지 않고 다르게 존재하는 교회의 정체성을 보여주어야 할 때이다.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