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 (3)마음 어루만지는 공감의 지도자

[ 특집 ]

정지석 목사
2016년 03월 17일(목) 13:33

정지석 목사
국경선평화학교 대표

분노하기보다는 가슴 아파 했던 정치인, 눈앞의 이해득실보다는 국민의 마음을 먼저 생각했던 정치 지도자로 지금도 미국 국민들 가슴 속에 남는 사람은 링컨 대통령이다. 그는 갈갈히 찢겨진 미국을 연방으로 통일시켰고, 흑인 노예를 해방했다. 분열과 반목이 일상화된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써 소명을 감당한 정치인으로 필자는 링컨을 생각한다. 링컨을 이렇게 회상하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링컨과 같은 정치적 리더쉽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링컨은 기도하는 정치인이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세상 정치 현실 속에서 구현하려고 노력했다. 우리나라처럼 남북전쟁을 했던 미국인들을 향해 링컨은 "우리는 적이 아니라 친구다. 원한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외쳤다. 오늘 남북한 대립과 갈등으로 온 국민들이 힘든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정치 지도자들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링컨의 리더쉽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공감의 리더쉽이다. 그는 정치적 상대를 힘으로 내리치기 보다는 가슴으로 아파하면서 대했고, 인내하고, 포용했다. 그는 학연, 지연, 혈연, 인맥, 정치기반 등 모든 분야에서 내놓을게 없는 정치인이었지만 무슨 일이든지 함께 마음을 나누는 진정성을 갖고 사람을 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대통령으로 세웠다. 겸손한 자는 높임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삶으로 보여준 셈이다. 대통령이 돼서도 자기를 비난하고 욕하는 반대파를 장관으로 중용했다. 공감의 리더쉽은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대하는 리더쉽이다. 공감의 리더쉽은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기도에서 형성되는 영성 리더쉽이라 하겠다. 이런 리더쉽을 가진 정치인들이 분열과 갈등으로 뒤덮힌 우리나라에 많이 나와야 하고, 이를 육성하는 책임은 우리 교회에 있다. 주일학교 교육에서부터 장년 교육까지 자신과 다른 생각을 존중하는 마음, 어렵고 약한 사람의 형편과 마음을 이해하는 마음, 북한 동포를 사랑으로 포용하는 마음을 기를 수 있는 신앙교육이 활발하게 이뤄져야 한다. 

신문 방송에서 보여주는 정치인들의 모습은 마냥 싸우고, 부패하고, 권력욕에 찌든 얼굴이기 때문에 우리 일반 시민들은 정치를 외면하고, 정치인들을 싫어한다. 특히 교회 안에서는 정치 이야기 하기를 꺼린다. 정치는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는 원흉이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기피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우리 개신교는 올바른 정치를 위한 정신적, 영적 지원을 권장해 왔다. 종교개혁자 캘빈은 직접 정치 현장에 참여했고, 영국의 종교개혁파들인 청교도들은 크롬웰과 손을 잡고 청교도 혁명을 일으켰다. 부작용도 있었지만, 개혁교회 전통은 신앙의 자유와 함께 정치적 자유, 그리고 사회개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교회 전통을 세워왔다. 이런 전통은 우리 한국 역사 속에서도 이어져서, 우리 교회는 일제 치하 독립운동에 앞장섰고, 한국전쟁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제부흥과 민주화운동, 남북한 통일운동, 사회정의와 생태계 보전운동, 평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신앙부흥, 사회개혁 운동에서 많은 민족 지도자들을 배출했는데, 이들은 모두 민족의 마음을 가슴에 품은 공감의 지도자들이었다.

공감능력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포용하고 소통하는 능력이다. 공감을 잘하는 사람은 적일지라도 포용하고, 소통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포용심과 소통능력을 가진 사람이 공감의 지도자이다. 이런 지도자를 둔 나라는 평화롭다.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철원 지역에 전해내려오는 궁예와 왕건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다. 궁예는 설움과 역경의 삶을 살면서, 당시 서러운 삶을 살던 민초들의 마음을 공감할 줄 알았기에 왕이 됐다. 그러나 왕이 된 후에는 백성들을 몰아치고, 반대하는 세력을 탄압하는 정책을 펴다가 신망을 잃고 죽었다. 궁예를 몰아낸 것이 왕건인데, 그 역시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고려왕조를 세우는데 성공했다. 왕건은 매사에 잘 경청했다고 한다. 당시 갈라져 싸우던 후삼국을 통일한 저력은 한마디로 왕건의 잘 듣는 공감의 지도력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어려운 백성의 마음을 잘 읽었고, 적을 포용하는 공감 능력도 뛰어났다고 한다. 신라 사람들은 견훤에 대해서는 '늑대나 호랑이를 만난 것 같다'고 했지만, 왕건을 대할 때는 '부모를 뵌 것 같다'면서 환영했다고 한다. 적으로 싸우던 견훤을 대할 때도 왕건은 포용심으로 품었다. 궁예는 귀가 좁아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도선국사가 궁예에게 도성을 금학산 아래 세우면 5백년 왕조가 될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반대편 고암산 자락에 도성을 세웠다. 

소통과 공감의 능력은 어떻게 길러지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지름길은 진실한 신앙이다. 공감 능력은 잘 듣는데서 길러진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것이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려고 집중한다. 예배에서는 설교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사실은 마음을 기울여 듣는 것이다. 심청, 마음으로 듣고 진리에 복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공감의 삶이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지도자는 그러므로 먼저 마음 깊이 듣고 공감하는 지도자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 두 소리는 종종 동시에 들리기도 한다. 진리의 분별이 일어날 때 공감이 생긴다. 아, 하나님의 말씀이구나 하는 마음의 일치감, 이것이 공감이다. 이것은 정치 지도자들보다는 종교 지도자들의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지도자들에게 이 공감의 체험은 매우 긴요하다. 

요즘 정치 지도자들은 듣기 보다는 말하고 주장하기에 바쁘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일것이다. 그러나 들어야 한다. 지도자는 듣고 또 듣는 사람이다. 잘 들음으로서 말하는 사람이 지도자이다. 이것은 정치 지도자나 종교 지도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선거철이 다가온다.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많은 때이다. 이들은 어떻게든지 자신을 알리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 때 우리 교회와 크리스찬들은 좋은 사람을 분별해야 할텐데, 그 기준을 공감으로 잡아보자. 공감을 잘하는 사람인가, 아닌가 실험해보자. 그러려면 관심을 갖고 만나야 한다. 보내온 선거 정책 자료도 읽어보고, 거리에서 만나면 한번 말을 붙여보자. 교회 형편이 허락한다면 후보자들을 초청해서 토론회도 해보자.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지연, 학연, 혈연, 인맥, 정당에 관계없이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펴보자. 내가 말할 때 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음으로, 눈빛으로, 공감을 표현하면서 듣고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진심인지도. 그러면 정치 지도자를 뽑는 선거가 즐거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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