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방향과 속도 조정⑨ 루터의 종교개혁 기본강령

[ 김인주 목사의 이주의인물 ]

김인주 목사
2016년 03월 09일(수) 13:52

1520년에 루터는 종교개혁의 기본 강령에 해당되는 세 문서를 출간하였다. 다음 해에는 보름스에서 소집된 제국의회에 루터는 출두하여 주장을 철회하도록 강요되었다. 개혁자는 이를 거부하였고, 황제는 제국추방의 영을 내려 더 이상 공권력이 보호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루터는 귀환하지 못하고 일년 가까이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은거해야 했다.

비텐베르크에서는 루터가 없는 사이에 개혁이 진행되었다. 교역자들이 결혼하였고 성탄절에는 새로운 방식의 성찬식이 시도되었다. 칼슈타트가 개혁의 주도자가 되었다. 1522년에 들어서자 시민교회의 성상들이 철거되었다. 급격한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우려하는 분위기도 고조되었다. 경험이 부족한 멜랑히톤은 적절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흔들렸다.

루터는 돌아갈 것을 결심하고, 사순절이 시작되는 시기에 귀환하였다. 그 해의 교회력으로는 3월 9일이 사순절 첫 주일이었다. 이 주간에 루터는 시민교회의 강단에서 저녁마다 집회를 인도하였고 사태를 진정시켰다. 여기서 루터교회의 개혁의 수위와 속도가 조절되었다.

칼슈타트의 급진적의 개혁에 당황스러워 하는 신앙인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 지적되었다. 성상이 없이 예배드리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신도들에게는 적응할 수 있도록 기다려야 한다. 우상은 밖에 존재하는 것보다도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잡는 게 더 큰 문제이다. 우상숭배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설령 보이는 성상이 없더라도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반대로 마음이 정결하다면, 밖에 있는 화상이 하등 문제될 것이 안된다는 논리였다. 이제부터 교회의 중심에는 제단화가 설치된다. 그러나 예배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였고, 교육적인 내용을 담았다. 이런 점에서도, 비텐베르크 중앙교회의 제단화는 모범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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