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성경은 왜 강론하라고 하는가?

[ 기독교교육이야기 ]

전성수 교수
2016년 02월 17일(수) 10:26

구약 성경 말씀 중에서 유대인들이 가장 중시하고 목숨 걸고 지켜온 말씀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쉐마이고, 쉐마의 세 구절 중에서도 신명기 6장 4~9절 말씀을 가장 중시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구체적인 방법이 자녀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부지런히 가르치며"로 번역된 히브리어 본문은 '부지런히'라는 부사가 따로 없다. 다만 '가르치다'를 의미하는 '샤난'이 강조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이 되었다. '가르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샤난'의 어원적 의미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날카롭게 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반복하다'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의 교육방법은 주로 구전에 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반복학습이 중요하였다. 그런 점은 오늘까지 지켜오고 있는 이스라엘의 전통적 교육방법이기도 하다.

이런 전통적인 교육방법을 철저히 지켜오고 있는 정통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학교를 '예시바'라고 부른다. '예시바'는 '앉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동사 '야사브'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곧 '예시바'는 두 사람이 마주보고 앉아서 말로 서로를 가르치는 전통적인 교육기관이다.

'반복하는 것'이 교육의 방법론이라면, '날카롭게 하는 것'은 교육 내용이 질적으로 새로운 것이어야 함을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일수록 반복적으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반복만 하는 것만 강조하면 교육 자체를 망칠 수 있다. 반복하되 무디지 않도록 날카롭게 해야 한다.

그런데 쉐마의 방법적 핵심은 바로 강론에 있다. 왜 하나님께서는 자녀에게 부지런히 성경을 가르치는데 강론하라고 명령하고 있을까? '이 말씀을 강론하라'에서 강론하라의 원어는 '디베르'이다. 이것은 '그것들에 관해 말하라, 이야기를 나눠라'는 뜻이다. 이 동사는 규격을 갖춘 분위기에서의 강론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 속에서 나누는 대화를 의미한다.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종의 무의도적 신앙교육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교육의 장소는 "집안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이며, 교육하는 시간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이다. 다시 말하여, 신앙교육은 시공을 초월하여 삶의 전 영역에 침투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신앙을 가르치는 교육이 삶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에서 '강론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디베르'는 어원적으로 일상적인 삶 속에서 나누는 대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강론하다'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전인적인 교육으로서 무의도적인 것까지 포함된다.

그런 점에서 '강론하다'는 의도성을 지닌 '샤난'과는 대조를 이루는 신앙교육 방법이다.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에서 '강론'을 그대로 풀면 '가르치고 토론하라'는 것이다. 영어로는 'talk about'이다. 말 그대로 이야기를 나누라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쉐마를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언제, 어디서든 대화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고, 수다를 떠는 것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수다를 떠는 것, 그것이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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