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채찍 들고 감시 … 군번줄 목에 걸고 날마다 힘겨운 노동

[ 기고 ]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을 찾아서 - 한국 노동이민 100년(上)

정행업 목사
2016년 02월 02일(화) 10:15

 호놀루루, 라하이나항
나의 부친 정원재(1883-1955) 장로님께서 노동이민으로 하와이에 온지가 100주년이 되었다. 이민선 시베리아호를 타고 이곳 호놀루루항에 도착한 것이 1905년 2월 13일이었다. 이 배는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선 53번째로 165명을 태우고 왔다.

하와이의 8개 섬 중에 오와우 섬에 있는 호놀루루 항은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중요한 항구였다. 그 당시 하와이의 중요산업이었던 사탕수수 재배와 파인애플 경작을 위해 많은 인력이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세계 각처에서 노동력을 수입해왔다.

세계 33개국에서 약 40만 명의 이민 노동자들이 이 항구를 통해 입국했다. 그중에 한국인 이민자는 1903~1905년 사이 7415명이 왔고 그 후 1300명은 한국으로 귀국했고(7%), 1000명은 미 본토로 이주했으며 나머지는 이곳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참고:중국인 이민자 4만 6000명 중 귀국자 2만 3000명 50%, 일본인 18만 명 중 귀국자 9만 8000명 54%).

나의 부친께서는 호놀루루 항에서 입국 수속을 마친 후 곧바로 마우이 섬으로 배치되었는데 이 섬 서쪽에 위치한 라하이나 항에 상륙하여 푸우네네 농장으로 배치되었다. 라하이나 항은 한 때 하와이 왕국의 수도이기도 했고 역사가 깊은 항구로 아름답고 조용한 곳이다.

고래잡이로도 유명하고 일찍이 서구에서 와 개척한 자들과 선교사들의 활동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특히 볼드윈 홈 박물관에 이곳의 역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올드라하이나 감옥, 오래된 요새의 흔적, 코트하우스 등이 있다. 놀라운 것은 코트하우스 정원에는 미국 내에서 제일 큰 반얀(Banyan)나무가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며 더운 태양빛을 피해 시원한 안식처를 제공해준다.

1873년 4월 24일 카메하메하 왕후의 요청으로 개신교 선교 50주년을 기념해서 보안관 스미스가 식수한 것인데 식수 시 나무의 높이가 1.5m였던 것이 오늘날 높이 16m와 2700㎡를 뒤덮는 나무가 되었다. 여기 와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의 역사가 이 땅에 이 방향나무가 뿌리를 내려 성장하듯이 복음의 씨가 떨어져 착근되고 원주민을 상대로 7, 8개의 교회가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다.
 
 푸우네네 농장
나의 부친께서 마우이 섬에서 가장 넓고 비옥한 푸우네네 농장에 배속되어 일하셨다. 지금은 사탕수수 농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어 옛날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푸우네네 사탕제조 공장이 남아있어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은 1902년에 지어진 농장 감독자의 집을 후에 알렉산더, 볼드윈 사탕박물관으로 개관하여 옛 재료와 생활모습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내부는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탕농장이 시작된 역사와 개척한 인물들 그리고 사탕수수의 재배와 수확 그리고 그것이 사탕으로 정제 되기까지의 과정을 잘 알 수 있도록 설명해주는 축소된 기계도 있다.

전시되어 있는 것 중에 종이 인상적이다. 그들의 생활은 아침 5시가 되면 증기 고동이나 종을 울림으로 기상을 하고 5시 30분까지 조반을 먹고 숙소를 나와 일터로 가서 6시부터 작업이 시작된다. 그리고 11시 30분 오전 작업을 마치고 30분 간 점심을 먹고 오후 4시 30분에 작업을 마친 후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8시에 종이 울리면 소등을 하고 동시에 취침을 해야 한다.

작업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루나(감독자)는 긴 가죽채찍을 들고 늘 감시를 한다. 한국 일꾼들에게 이민생활에서 가장 힘든 점은 병영같은 규칙적인 생활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꾼들에게는 군인들이 사용하는 군번처럼 번호가 적힌 방고(일본어)를 목에 걸고 다니며 이것은 신분증과 같고 이것으로 월급도 수령했다고 한다. 당시 월급은 16불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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