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적 상상력

[ 논단 ]

고형진 목사
2016년 01월 13일(수) 10:12

고형진 목사
강남동산교회

오래전에 월터 브루그만은 그의 저서 '예언자적 상상력'을 통해 '예언자는 미래를 내다보는 자가 아니라 인간 정신을 외면하고 노예화하는 전체주의에 대항해서 한 공동체의 변화에 동기를 부여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그는 모세를 이 정의에 들어맞는, 예언자적 상상력을 가진 사람으로 보았다. 모세의 예언자적 상상력은 지금까지 억압과 착취 속에 익숙해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새로운 사회공동체를 제시했고, 그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곳으로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땅에 들어가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많은 신학적인 논지를 제외하고 단순하게 보면 모세의 상상력(물론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이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의 삶에서 구원받게 한 것이다.

모세 이전에도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성경에 기록돼 후세까지 전해질 공적이 없거나 미미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떻게 이런 예언자적 상상력을 가질 수 있었는가?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다고 본다. 즉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안타깝게 여기는 긍휼의 마음에서 모세의 예언자적인 상상력이 발현되었을 것이고, 그는 자신의 민족을 죽인 애굽 군인을 죽이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모세가 예언자적 상상력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40년간 고독한 광야생활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독한 광야가 바로 예언자적 상상력의 바탕이 된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대해 모두들 위기라고 말한다. 그런데 위기라고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거대한 조직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거대한 조직 안에 있기 때문에 침몰해 가는 과정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회생이 불가능한 상황에 닥쳐 어찌해 볼 겨를 없이 모두 함께 침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독한 광야를 경험하지 못한 그들은 여전히 교회가 희망이라고 말하고, 아직도 정치 놀음에 빠져 교회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전투구하고 있다. 총회든, 노회든, 항공모함은 방향을 바꿀 수가 없다. 이미 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동안에는 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한국교회는 손 놓고 침몰하는 것을 바라보거나 함께 침몰해야 하는가? 이제 한국교회는 항공모함이 가고 있는 방향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목회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한국교회에 새롭고 건강한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많은 목회자들은 자신이 배운 대로 목회를 한다고 하지만, 이제는 '배운 대로만 목회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수십 년 전에 보고 배운 것은 이미 과거의 목회가 돼버렸다. 시대가 엄청난 속도로 변화되어가는 이때에 과거의 목회를 그대로 답습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들 자동차를 타지만 나는 걷거나 말을 타겠다'고 고집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우리가 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미래의 목회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목회적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지금 편하게 누리고 있는 컴퓨터, 스마트폰, 자동차 등 수많은 문명의 산물은 어떻게 생겨나게 됐는가? 과학자들의 상상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상상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현재 목회 현장은 너무 우울하고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 새로운 패러다임의 목회적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다. 기존의 전통적 교회, 전통적 목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로운 세대의 목회적 상상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어떻게 목회적 상상력을 가질 수 있는가? 먼저 지금의 목회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현 상황에 대하여 가슴 아파하고 애통해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으로 출발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통찰력과 상상력을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또 하나는 목회의 기득권에 대해 철저히 내려놓는 것이다. 모세는 왕자로서 왕궁에서 평안하게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며 살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지도자가 되었을 때에는 이 모든 것을 내려놓았고, 그럼으로써 예언자적 상상력을 가질 수 있었다. 한국교회를 새롭게 변화시킬 목회적 상상력을 가지는 것은 목회자가 먼저 기득권을 내려놓음으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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