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매일 오시는 예수님-(4)다시 기다리는 사랑

[ 특집 ] "기다림, 믿음ㆍ행함이 나타날 시간"

박수암 교수
2016년 01월 13일(수) 09:55

박수암 교수
장신대 명예ㆍ신약학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사랑이시다. 그는 사랑의 화신(化身)이시며, 사랑 덩어리이시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사랑을 정의하고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고전 13:4~5). 여기 '사랑'이란 말 대신에 '예수님'을 넣으면 아주 잘 어울린다. "예수님은 오래 참고 예수님은 온유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바울은 아마도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의 유명한 사랑 장을 기록했을 것이다.(칼 바르트)

성탄은 이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이다. 그분은 초림시에 이 세상에 오셨을 뿐 아니라, 승천하신 후에도 성령을 통해 매일 성도들 안에 오신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 다시 이 세상에 오신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여기서 '다시 옴'은 재림을 의미하는 것으로, 히브리서 9장 28절에는 '두 번째 나타남'으로 나온다. 이런 재림에 대한 말씀은 그의 부활과 성령수여를 전제한 말씀들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다시오시는 목적은 성도의 구원을 완성하고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초림 시엔 속죄하는 어린 양(암노스; 요 1:29, 행 8:32, 벧전 1:19)으로 오셨지만, 재림 시엔 묵시적 어린양(아르니온; 계 5:6, 8, 12, 13, 6:1, 16, 7:9, 10, 14, 17, 12:11, 13:8, 14:1 등)으로 오신다. 초림시엔 사랑의 화신으로 오셨지만, 재림 시엔 공의의 심판주로 오신다. 초림 시엔 유순하고 인자하여 고난만 받으신 종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재림 시엔 존귀를 받으신 만왕의 왕, 승리자, 사단과 짐승의 권세를 복수하시고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신, 진노하시는 하나님으로 오신다. 초림시엔 초라한 가운데서 은밀히 비밀한 가운데서 오셨지만, 재림 시엔 온 인류가 보는 가운데서 구름을 타고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신다. 그리하여 바울은 재림을 '파루시아(왕의 행차)', '아포칼룹시스(감추인 것들을 들어냄)', '에피파네이아(왕의 능력의 현현)'이라 부른다. 재림은 그처럼 영광스러우며, 지금까지 감추인 것들이 드러나며, 왕의 능력이 현현하는 사건이란 것이다.

그 시기는 임박하면서도(눅 9:61 이하, 마 10:23, 막 9:1, 13:10), 지연된 시기이기에(마 24:14, 25:13, 19, 눅 19:11~12, 20:9, 21:8~9 등),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른다(예수님은 예보를 하신 것[predict]이 아니라, 예언을 하셨으며[prophesy], 시간의 양(量)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시간의 질(質)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깨어 있어야 한다"(막 13:33, 마 24:42, 25:13, 눅 21:36 등)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롬 13: 12)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벧후 3:11~12) 다시 오실 그 사랑(예수님)을 기다리며, 이 땅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며, 땅의 것을 버리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삶은 어떠한 삶일까?

첫째, 믿음을 지키는 삶이다. 우리에게 오는 미래적 천국은 돈으로도 못가고, 힘으로도 못가고, 오직 믿음으로만 간다. 그리하여 천국을 눈 앞에 둔 우리에게는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8)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계 2:25)

둘째, 행함으로 믿음을 입증하는 삶이다.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그 믿음은 순종 즉 행함으로 입증이 되어야 한다.(롬 1:5, 약 2:22) 이 행함은 그 큰 사랑에 대한 감격과 믿음에서 오는 행함이다. 이런 행함으로 입증이 되지 않는 믿음으로는 등만 있고 기름은 없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와 같이(마 25:8~12), 신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가 없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주님의 '예복비유'이다.(마 22:11~14) 우리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행함의 예복을 입어야 한다(계 19:8). 이 행함은 크게는 '사랑'이란 말로 설명할 수 있고, 작게는 예수님의 말씀들을 순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제자도를 실천하는 삶이다. 믿음은 제자도를 실천하는 힘이 있다. 그 사랑에 감격한 성도는 진심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제자도를 행하게 된다(믿음의 역사). 예수님은 그의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이 그 달란트를 땅에 묻어놓고 주인을 위하여 아무런 이익을 남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어 쫓겼다는 말씀을 하셨다.(마 25:24~30) 또한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믿는 자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봉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됨을 말씀하셨다(마 25:41~46). 

이는 제자도를 실천하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이 입증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그와 그의 말을 부끄러워하면 그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겠다고 하셨다.(막 8:38) 또한 그 분은 "나와 함께 아니 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해치는 자니라"고 하셨다.(마 12:40) 이 모든 말씀은 우리가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함에 있어 제자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누가는 그의 유명한 '예수 뵈뢰아 전도기'에서(눅 9: 51~19:27) 교회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제자도를 보여준다. 누가복음에서 요단강은 구약시대를 나타내고, 갈릴리는 예수시대를 나타내고, 뵈뢰아는 교회시대를 나타내고, 예루살렘은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나타낸다. 누가에 있어 요단강은 세례요한의 영역이고, 갈릴리는 예수님의 영역이고, 예루살렘은 구속사역을 완성한 영역이다. 그렇다면 뵈뢰아는 제자들의 영역일 수 있다.(콘젤만) 누가는 그의 복음서 다른 부분에서는 '제자들'이란 용어를 12회만 사용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21회나 사용하며, 갈릴리 사역에서는 제자들이 청중으로 2회만 등장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제자들이 주된 청중으로 되어 있다.(E.P. Ellis, L.T.Johnson) 누가는 이 부분에서 예수님의 교훈을 기록함에 있어, 예수님의 여행이라는 전기적인 관심보다는 제자도에 대한 교훈적인 관심에서 주제별로 기록한다. 그는 이 부분에서 교회시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특히 힘쓸 일들을 기록한다. 제자들은 전도해야 하며(눅 10:1~16), 사랑해야 하며(눅 10:25~42), 기도해야 하며(눅11:1~13), 회개해야 하며(눅13:1~9), 용서해야 하며(눅 17:1~4), 믿음을 가지고(눅 17:5~6),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대비하여 경성해야 한다(눅 12:1~13:9, 17:20~18:8). 그는 겸손해야 하며(눅 17:7~10),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눅 16:1~31). 그는 제자 된 자로서의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눅 9:57~62, 14: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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