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공보 기획> '금강산업열처리' 대표 권혁구 장로

[ 교계 ]

신동하 기자 sdh@pckworld.com
2016년 01월 05일(화) 16:58
▲ 믿음의 가정을 이룬 권혁구 장로. 권 장로 가족은 매주 토요일마다 한자리에 모여 가정예배를 드린다.

인천 남동공단에서 자기소둔열처리 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권혁구 장로(인천동노회 인천교회)는 30여 년간 남모르게 선행을 베풀어오고 있다.

권 장로의 미담을 그의 최측근 지인으로부터 기자가 우연히 듣고 인터뷰 요청을 하자 몇 번의 고사끝에 수락했다. 그는 "절대 미화하지 말라"는 수차례의 당부를 확인하고 나서야 인터뷰에 응했다.

2015년이 마무리되기 전인 12월 30일, 그가 대표로 있는 '금강산업열처리' 공장을 찾았다. 사업장을 들어서자마자 '믿음의 기업'인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공장과 사무실 곳곳마다 걸린 판넬에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기업', '하나님은 우리 회사의 주인이시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공장 한켠에는 예배실까지 구비돼 있다.

업계 부동의 선두를 달리는 기업의 대표는 수수한 얼굴에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권 장로는 "기사가 나간다면 아무쪼록 하나님 홀로 영광받으시기를 바랄 뿐이다"라며 인터뷰의 첫 운을 뗏다.

권혁구 장로는 1949년 충북 충주 시골마을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2살 때 여의고 홀어머니 보살핌 아래서 자랐다.

"6.25 전쟁이 터지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어머니와 친할머니가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어머니는 5일장이 서면 40리길을 걸어가 과일을 팔아서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말도 못할 고생이 이어졌다. 배를 곯는 건 일상이고 어쩌다 할머니가 잡아준 개구리를 구워먹는게 영양식이었다.

권 장로는 "당시에는 대부분이 못먹던 시절이라 그런 것에 불만은 없었지만 아버지의 부재가 내게는 큰 아픔이었다. 아버지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고 고백했다.

1960년 둘째누나가 권 장로를 공부시키겠다며 서울로 함께 상경했다. 또다른 고생문이 열렸다. 누나는 좌판 장사를 하고, 권 장로는 신문배달로 생활비를 보탰다. 그 와중에 서울로 온 큰누나와 매형의 도움을 받아 학업과정을 마쳤다.

충주에서 군대 방위생활을 하며 농협에서 한시적으로 일했던 그는 성실성을 인정받아 제대 후에도 계속 일을 했다. 직장에 다니며 중매로 부인 신채철 권사를 만나 1973년 결혼한 후 청운의 꿈을 안고 당시 돈 2800원을 들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결혼 당시 아내의 조건은 교회를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결혼 후에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교회를 열심히 나가던 아내를 핍박하기까지 했습니다."

신혼 초기 누나집에 얹혀살다 보증금 없는 산동네 무허가 판자집 2층에 월세로 들어갔다. 권 장로는 자동차부품 만드는 공장에 다니고 부인 신 권사는 재봉틀로 수 놓는 일을 했다. 이 무렵 '회심의 사건'이 일어난다.

권 장로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투고 퇴직금 230만원으로 열처리 사업을 시작했지만 지지부진했고, 설상가상으로 무허가집이 철거반에 의해 뜯겨지며 고난에 처하게 된다. 그 와중에도 부인 신 권사는 뜨개질하며 얻은 적은 돈도 무조건 십일조를 하며 믿음을 굳게 지켜나갔다.

권 장로는 극심한 경제적 고통에 시달릴 때 심방 온 한 전도사에 의해 예수님을 영접했다. 권 장로는 "신앙을 가지게 된 배경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젊은 시절 겪었던 고난은 훗날 무슨 일을 해도 담대함이 넘치는 자양분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가 지금 운영하는 '금강산업열처리'는 세계적기업 보쉬와 현대기아자동차가 생산하는 자동차엔진과 전자계기에 들어가는 부품을 납품하고 있다. 업계 불황에서도 사업이 날로 확장되는 기적을 체험하고 있다.

▲ 권혁구 장로는 자신의 집무실 안에 세계지도를 붙여놓고 매일 선교기도를 드리고 있다. 권 장로는 5개국 10여 명의 선교사를 매달 후원하고 있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자 투철한 사명이 생겼다. 어느날 사도행전을 묵상 중 20장 24절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는 말씀이 마음판에 새겨지며 선교에 매진하기로 했다.

현재의 공장을 준공하며 감사예배를 앞두고 그는 "5대양 6대주를 선교로 품을 수 있게 해달라"는 서원기도를 했다. 그 기도의 성취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현재 해외 5개국 10여 명의 선교사를 지원하고 있다.

권 장로는 "나는 맨몸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 하나님께 받은 것 많은 이들과 나누는 것은 당연하다"며, "욕심 줄이면서 하나님의 영광 드러내는 것이 내 삶의 목표"라고 밝혔다.

또 권 장로는 노회 내 개척교회 10곳을 비롯해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을 돕고 있다. 그 흔한 '전달 사진' 한장 찍은 적이 없을 정도로 순수하게 돕고 있다. 특히 자립대상교회 목회자 10명에게 매달 20만원 상당의 주유권을 지원하고 있다.

권 장로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살면서 한가지 지키는 원칙이 있다. 회사를 경영하며 잘될 때도 있지만 어려움도 있는데 이때도 선교비를 줄이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권 장로는 회사 내에서도 언제나 정직과 성실로 본을 보이고 있다. 직원 가운데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들에게 '행동으로 전도'하고 있다.

권 장로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 평소 행실은 흐트러지면서 전도하려고 하면 당연히 따르지 않는다"며, "비겁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행동해야 전도가 잘 되는 것"이라는 소신을 밝혔다.

한편 권 장로는 최근 예수전도단이 운영하는 DTS 훈련을 받으러 호주에 6개월 과정으로 다녀왔다. 신앙의 깊이를 더하고, 다시 한번 선교의 사명과 확신을 가지면서 젊은이들에게 비전과 도전을 심어주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DTS 참석자들은 20~30대 청년들이었고, 노년층은 아버지 뻘인 권 장로 혼자였다. 그는 3개월 간 매일 5시에 기상해 예배드리고, 큐티, 식사, 강의 경청, 봉사, 성경묵상, 평가회 등을 마치고 오후 10시에 잠자리에 드는 강행군을 소화해냈다. 그리고 3개월 아웃리치 과정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권 장로는 "뒤쳐지지 않으려 나름대로 노력했다"며, "내 자아와 고집을 깨트리는 시간이 됐다"고 설명했다.

권혁구 장로는 부인 신채철 권사와의 사이에 3녀를 두고 있다. 교계 경력으로 인천동노회 부노회장, 총회 평신도지도위원회 회계, 인천동노회 남선교회장과 장로회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총회 남북한선교통일위원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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